Essay to Joy
늙어가는 것일까?
말투가 툭박지고 침묵이 좋아진다. 그러다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또 하고 또 한다. 사람을 만나면 고개로만 까딱 인사 한다. 나도 모르게 뻣뻣해진다.
늙어가는 사람은 늙었다는 말만 들으면 말초신경이 달팽이 눈처럼 세워진다. 확실히 나도 늙어가고 있다. 이 진리를 깨우쳐 준 것은 가까운 벗도 아니요 영성이 깊으신 목사님도 아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어느 꼬마이다. 그야말로 꼬마는 이상한 장소에서 천기누설 같은 진실을 터트려 깨우쳐 주었다.
누가 말했던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목욕탕 안은 한가하다.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앉아 있으려니 슬슬 졸음이 몰려온다. 바로 옆에는 미지근한 온도로 아이들이 놀기 좋은 욕탕이 있어 뽀얀 우윳빛 피부를 한 코흘리개 남매가 첨벙대고 있다. 나는 펑퍼짐하게 반 누워서 꾸벅꾸벅 존다. “ 할머니…….” 눈이 번쩍 뜨인다.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머리가 띵하다. 삼라만상이 정지된 순간이다. 잠이 확 달아난다. 믿을 수 없어서 왼쪽, 오른쪽 두리번거린다. 나 말고 탕 안에는 아무도 없다. ‘날 보고 할머니라니....’ 당혹감과 함께 왠지 모를 슬픔이 울컥 복받친다. 코흘리개가 던진 한 마디는 머릿속에서 낡은 벽보처럼 펄럭인다. 물에 깔리기라도 한 듯 심한 압박감을 밀어내고 상체를 일으킨다. 이제 쉰 중반이다. 코흘리개 말을 부인하고 싶어 거듭 도리질을 한다. 이대로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태연해지려고 하지만 자동으로 치켜떠지는 눈꼬리를 애써 잡아 내리어도 목소리는 앙칼지다. “얘, 날보고 할머니라고 했니?” 설령 그럴지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주기를 기대했다. 손사래를 칠 줄 알았다. 꼬마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대꾸한다. “네” 새 옷 입고 외출했다가 물벼락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허망하고 억울하다. 오래전, 버스기사에게 아줌마란 소리를 맨 처음 들었을 때도 불화가 끓어 남편을 쫀득쫀득 졸라댔었다. 날 아줌마로 만든 장본인은 당신이라고 아아, 아줌마란 소리도 끔찍한데 할머니라니…….진실은 잔인하다. 기분이 납작해진다. 소리 지르고 싶다. 다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애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나는 말을 잃고 흥분을 삭히느라 절절맨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참는다.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째려본다. ‘ 넌 내가 맨 처음 태워 날 때부터 이렇게 늙은이로 태어났을 거로 생각하는 거지? ’ 속으로만 말한다. 아이는 자신이 지껄여댄 한마디가 소금을 뿌린 듯 쓰리고 아린 이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이다. 작고 가벼운 아이는 키가 내 무르팍을 겨우 넘어섰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쌍꺼풀도 안 생긴 눈이 은행 알처럼 둥글 러브 데데하다. 귀밑 볼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뽀송뽀송하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무엇 때문에 저 할머니 표정이 외상값 받으러 온 사람처럼 갑자기 사나워졌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눈치를 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할머니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지 몸을 움츠린다. 겁을 먹고 눈길을 던지는 각도가 불안하다. 그러자 외상 먹었으니 이제 안 오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물방울을 튕기며 훌쩍 탕 밖으로 꼿꼿이 나가 버린다.
혼자 남은 남자 코흘리개는 세숫대야로 물을 퍼서 밖으로 연실 부어대며 첨벙댄다. 할머니란 단어가 명치끝이 아릴 정도로 밀려든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허망한 세월의 흔적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 늘어진 피부와 깊은 주름살, 희끗희끗해진 앞 머리칼 나의 존재를 눈여겨볼 틈도 없이 딱한 삶을 산 건 아니다. 세월과 함께 자연스럽게 늙어갈 뿐이다. 그럴지라도 서글프다. 그 애가 왜 갑자기 날 불렀을까. 너는 누구인가? 확인시켜 주려고 신이 보낸 천사였을까. 이쯤에서 풀썩 무너질 순 없다. 신경은 여전히 내가 아줌마로 보이느냐 할머니로 보이느냐에 머물러 있다. 뒷목이 땅기도록 턱 끝을 세우고 애써 미소를 짓는다. “얘” 동생이 없어 진 줄도 모르고 혼자 물장난을 치던 오빠 코흘리개가 바라본다. 까만 산포도 한 알을 박아 놓은 듯한 눈망울이 수증기 속에서 유리처럼 반짝인다. “ 내가 할머니 같아?” “아니요 아줌마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바겐세일 하는 슈퍼마켓에서 행운권 추첨으로 19인치 텔레비전 한 대 당첨된 기분이다. 다시 확인하고 싶다. 다시 듣고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생긋 웃으며 나는 아부를 한다. “ 내가 할머니 같아?” “아줌마 같아요. 아줌마죠?” 혼란을 겪는 심중을 알아차리기라도 하는 듯 아줌마란 단어에 또랑또랑 힘을 준다. 기분이 어떤 시원한 이상의 벅찬 감동이다. ‘ 얘야, 난 아직은 아줌마란다’ 속으로만 말한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친다. 넌 확실히 사람 볼 줄 아는구나. 네 동생은 백여우 같은데 너의 귀여운 볼때기는 까무러칠 지경이구나. 너는 예사롭지 않은 아이구나.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말이야 대통령이 되든지 법관이 되든지 아무튼 너는 굉장한 사람이 되고도 남을 거야. 아니지 설악산 기슭에서 언 손을 비비며 애쓰는 대한민국의 씩씩한 군인이 될 거야. 그리하여 먼 훗날 너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장관감이지. 그 애와 친해지고 싶어진다. 그 애 역시 활짝 웃으며 내가 있는 탕 속으로 들어오고 싶으나 물이 뜨겁다고 손을 넣었다 뺐다 한다. 뜨거워서 들어갈 수 없다는 표정이다. “ 얘야,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인생의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단다.” 아이는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나는 다시 말한다. “ 여기로 들어오고 싶으니?” “ 그런데 물이 너무 뜨거워요. 아줌마는 어떻게 거기에 있으셔요?” “ 여길 들어오려면 인생의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단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뜨거운 곳에 앉아 있는 특권 같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 네, 몰랐어요.“ “ 뭘 몰랐어?” 아이는 모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르는 그것도 무언지 모른다는 표정이다. “ 얘야, 너 인생의 뜨거운 맛 알아?” “ 몰라요” “ 너 몇 학년이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 초등학교에요” “ 그러니까 초등학교 몇 학년이냐고 오 오 오 오 ” “ 초등학교라니깐요 요 요 요 요요 ”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아니 초등학교 몇 학년이냐고 하니까 자기가 몇 학년인 줄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인생의 뜨거운 맛을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물어보는 내가 바보지 그때이다. 낯선 할머니의 따가운 눈겨룸을 피하려고 탕 밖으로 도망갔던 동생 코흘리개가 다시 온다. “나는 삼화 어린이집 다니고요 오빤, 초등학교 유치원 다녀요 ” 아하, 그렇게 되는구나. 초등학교부설 유치원이 있다는 것을 깜박했다. 역시 네 말대로 나는 할머니 과에 속한 구나.
아무리 내가 발악을 한다 해도 대한민국이 법적으로 정해놓은 노인 나이는 55세 바로 나다. 친구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떴거나 손자를 본 친구들도 있다. 한국은 젊은이들의 천국이다. 영화관 커피숍 옷가게는 젊은이들이 독점하고 후질그런 노인은 갈 곳이 없다. 나이 차를 두고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없는 시대이다. 노인에게 물어볼 말이 없는 시대, 인생의 경륜에 대한 호기심이나 경외심이 없는 시대이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지만 늙어가는 것은 확실히 서글프다.
아직도 사는 것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는 청춘 같은데 당신은 늙었다고 남들이 그런다. 남들이 그러니까 나도 그런 것 같다. (2008년 한국여성문예원 최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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