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네사 갈란테는 비브라토를 아주 작은 폭으로 필요한 부분만 적절히 사용하고 음을 단단하게 모아 정확하게 발성하는 오페라 가수이다. 아주 잘 나간다는 가수의 경우에도 과도한 비브라토 때문에 상대적으로 완벽하다는 평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갈란테의 발성은 참으로 정갈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깔끔한지 어디 비집고 들어가서 시비를 걸 구석이 보이질 않을 지경이다. 심지어는 아주 극적인 작품을 연주할 때에도 그녀의 가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음 하나 하나에 깊은 의미를 담고 아주 단단하게 노래한다. 세계적으로 스타 대접을 받는 갈란테지만 그 명성치고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비평가의 낙점도, 음반사의 극성스런 홍보 전략도 없이 오로지 대중의 선택을 기반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영문이름(Inessa Galante)에서 프랑스어 갈랑트(Galante·화려한)를 연상하는 이도 있겠지만 갈란테의 목소리는 화려하기 보다 우수에 젖은 듯 어둡고 깊게 울린다.
가슴 밑바닥의 슬픔을 건져 올리듯 고독하고 애절한 울림이 반복되는 이네사 갈란테의 카치니 아베마리아
1959년 라트비아공화국 수도 리가에서 태어난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는 32세가 될 때까지 발이 묶여 있었다. 냉전시대 구소련 지배하에서는 미국 등 민주주의 국가로 진출하는 것이 제약됐기 때문이다. 주로 모스크바와 키예프, 오데사 오페라극장에서만 노래를 불렀는데도 그의 정결하고 숭고한 목소리는 미국 거장 예후디 메뉴인과 주빈 메타 귀를 번쩍 띄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갈란테에게 서방 세계 데뷔를 적극 제안했지만 이념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바깥 세상을 꿈꾸던 그녀에게 1991년 라트비아가 구소련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비로소 기회가 왔다. 1992년 독일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미나 역으로 서방에 첫선을 보이게 됐다. 그러나 화려한 고음이 아니어서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그다지 돋보이는 존재는 아니었다. 맑고 서정적인 음색에 차분하고 지적인 외모만으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었다. 모든게 뜻대로 되지 않고 열정
마저 시들해질까봐 두려워질 때면 그는 불 꺼진 무대에서 기도를 올렸다. 세상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좋은 노래를 부르게 해 달라는 간절한바람이었다. 그의 소원은 1995년 음반인 데뷔 Debut를 통해 이뤄졌다. 오랜 세월 악보 속에 잠들어 있던 줄리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에 숨결을 불어넣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신의 구원을 애타게 바라는 듯한 이 노래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베 마리아는 가톨릭 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Glorla(대영광송), Credo(사도신경)등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천사의 축복, 성모 영보 때의 마리아에 대한 찬미와 사촌 엘리사벳의 축하 노래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기도문을 아름다운 선율로 옮겨 놓은 종교적 열정을 노래한 장중한 곡이다. 작곡자인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공부하였고, 1565년 부터는 메디치가를 섬기면서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1570년대 조반니 데 바르디 백작의 살롱에 모이던 카메라타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602년 피렌체에서 공연된 오페라 '에우리디케 (Euridice)'는 지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새로운 단선율(모노디)을 개척하였으며 그가 펴낸 선음악 (Le Nuove Musiche-1602)과 새로운 음과 새로운 작곡법 (Nuove Musiche e nuove di scriverle - 1614)은 초기 바로크 음악의 지표로서 많은 작곡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새로운 단선율이란 기교적인 높은 성부의 음성과 훌륭한 꾸밈음에 단순한 코드의 베이스가 뒤따르는 양식으로, 바로크 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세기를 포함하는 가곡 형식의 역사를 거론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사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1990년 이전에는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네사 갈란테의 목소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사실은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카치니의 작품이 아니라 러시아 출신의 기타 및 푸트 연주자였으며 작곡가인 블라디미르 바빌로프 (Vladimir Vavillov)에 의하여 작곡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르네상스 혹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이름을 빌어 발표하는 기이한 습관으로 사람들을 혼동시키곤 하였는데, 작품이 작곡가의 정신이나 경향에 부합되는지 여부는 무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을 현혹시키는 그의 대표작들은 프랜시스코의 칸초네, 시크라의 마주르카, 비소츠키의 엘레지 등이 있고, 그 유명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도 포함된다. 1970년에 이 곡을 완성한 블라디미르 바빌로프는 1972년 '작자 불명의 아베마리아'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취입까지 했었다고 하는데, 카치니의 성향과는 완전히 상이한 이 곡이 카치니의 작품으로 알려지게 된 과정은 확실하지 않다.
동유럽의 소리내기는 비브라토를 필요할 때 약간 사용하고 있으며 발성의 정확함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 이네사 갈란테의 음색은 이러한 동유럽적 특징을 십분 보여주고 있다. 색감을 중시하고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곱게 다듬어진 목소리나 완벽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화려한 기교의 소프라노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음색으로 작품이 가진 스타일과 느낌을 온전히 살리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그녀의 인기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이네사 갈란테의 장점을 십분 살린 곡이 바로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였다. 기교가 뛰어나고 아름다운 음색을 지니고 있지만 기교를 신경쓰지 않고 아름다운 음색을 내려고 하지 않은 천상의 소프라노 갈란테는 극적인 대목에서도 가창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으며, 어떤 부분을 노래해도 경직되어 있지 않으며 거친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항상 편안하고 시원시원하게 뻗어나가고 유연해서 작품에 깃든 의미가 선명하고 아름답게 전달되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주인공이다.구소련 라트비아 공화국 출신의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가 95년 데뷔 앨범에 수록하기 전까지 이 곡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갈란테로 인해 전세계에는 카치니 신드롬이 일어났다. 1995년 앨범 Debut에서 카치니 아베마리아의 선풍적인 인기로 세계 무대에 그녀의 이름을 각인시키게 된다. 1999년 네델란드에서 그녀의 Debut앨범이 10만장의 판매기록을 하면서 2000년 홀란드 플래티넘 디스크 어워드를 수상한다.
무명이었던 갈란테가 스타덤에 오른 것은 물론이었다. 이 곡은 국내에서도 라디오 음악방송에 소개되고 드라마와 CF 삽입곡으로 쓰이면서 2001년 무렵부터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샬롯 처치, 레슬리 가렛, 조수미, 임형주 등 수많은 성악가와 팝페라 가수들이 경쟁하듯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지만, 지나친 기교 없이 담백하면서도 경건한 갈란테의 목소리를 따를 자는 없다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네사는 결코 화려한 기교를 뽐내지는 않지만 저음에서부터 천천히 솟아올라 풍부한 고음을 소화해내는 목소리를 보여준다. 다른 화려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그것처럼 긴장감은 없지만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며 한번쯤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게끔 한다. 갈란테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노래에 얽힌 일화 등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며 관객들은 이네사의 말을 듣고 노래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음악은 상호 교통과 이해에 기반한 무언의 대화임을 그녀는 잘 이해하고 있는듯 하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던 어머니와 테너가수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음악은 숨쉬는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것 이었고 음악적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그녀는 음악가의 길 보다는 의사나 철학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우연히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한 음악가로 부터 음악을 할 것을 제의 받으면서 성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리가와 주변의 동구권 국가들에서 활동을 했으며 Kirov Opera에서 정규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하게 되면서 소련 모스코와 키에브, 오데사로 그 활동영역을 넓힌다.미국과 캐나다의 순회공연은 비평가들에게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주목을 하게 만들었으며 예후디 메뉴인과 주빈 메타는 그녀에게 서부 진영으로 데뷔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그녀의 서부진영에서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소였다. 1991년 라트비아가 러시아로 부터 독립을 하여 비로소 세계무대로 데뷔하여 1992년 독일 만하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미나 역할을 시작으로 하여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카르멘에서 돈 호세의 버려진 애인 미카엘라역을 호연하면서 비평가들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선 15년 후인 1995년 음반사 Campion Record에서 제작된 데뷔 앨범인 아베 마리아의 선풍적인 인기는 세계 무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페라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가치니의 16세기 가곡을 19세기 낭만주의 스타일로 왜곡 했다는 비판도 있으나 음반 덕분에 이 노래 역시 한 순간에 클래식 필수 레퍼토리로 뛰어올랐다. 그 음반은 영국과 네델란드 등에서 클래식 챠트 1위에 올랐고, 일본에서도 단숨에 25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영향으로 카치니 아베 마리아는 1996년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곡 1위에 오르는 등 화제가 이어졌다. 이네사 갈란테의 면모는 콘서트에서 그 빛을 발한다. 그녀의 콘서트는 한 편의 서정적 에세이와 같은 흐름을 탄다. 그는 곡에 얽힌 사연이나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중간중간 풀어놓으며 나직나직 관객과 교감한다. 세상은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적어도 소프라노가 없어서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네사 갈란테가 있으므로"라는 한 외국 평론가의 찬사도 지나친 과장으로 들리지만은 않는다. 종종 이네사 갈란테는 "테레사 수녀같이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연주회 도중 휴대폰이 울리는 경우를 이야기하던 자리에서는 "고전과 현대문명이 조화를 이룬 순간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여유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