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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모딜리아니'의 작품과 심층분석

素彬여옥 2013. 1. 10. 09:19



 

모딜리아니 Amad eo modigliani

붓 하나 없이 계절마다 신비의 수채화를 그려내는 자연의 손길 고요하게

그러나 순수하게 그 빛깔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그 향기만으로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나무와 풀, 꽃은 오늘 어떤 기도를 할까. 살아가는 동안 바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나무는 흔들리는 잎새들에게 일러 주겠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할 때는 꽃이 필 때가 아니라

 

질 때라는 것을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빛깔보다는 그 향기 때문일 거라고 깊은 숲 속에서 흐르는
한 모금의 샘물을 마시는 기쁨을 맛보려면 뿌리까지 길어오는
역경을 이겨내야 한다고...


막스 쟈콥의 초상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모자를 쓴 여자

미남자였던 모딜리아니는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 이게 했었다는 것은 그의 전기의 어디서나 발견된다.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의 카페에서 그리고 망파르나스의 로톤드나
도움의 카페 같은 데 앉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처녀들은
빠져들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다. 이 작품의 모델인 로롯트라고
불렸던 파리잔느는 얼마간 바람기들은 용모를 띠고 있으며,



블론드의 여자(르네) 르네라는 이름은 한국의 옥순이처럼 프랑스 여성의 이름이며,
파리의 여기저기에 르네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한 프랑스 여성의 초상화이면서 모든 르네의 초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점차로 무르익어 가는 모딜리아니의 원숙한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모델을 포근하게 포용하는 표현력이 넘쳐 흐르고 있다.



쟈크 립시즈 부처의 초상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한카 즈보로스카의 초상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샤임 스틴의 초상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한다.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들 했다.


반 뮈덴 부인의 초상

이 작품의 구도는 회화의 자율적인 운영만으로 잡혀진 것이라기보다
모델인 대상의 인간과의 교류를 통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 주는 화면이다.
가령 크로드 로와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모델은 흔히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긴장을 푼 상태의
가을 날씨처럼 가라앉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앉아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가 나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16년경부터이며,
그가 죽기 전의 1919년 경까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델이 된 나부들은 앞에 소개한 안나 즈보로스카,
비아트리스, 쟌느 에퓨테른느 등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말인 12월 3일부터 30일까지 모딜리아니로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벨트 에일 화랑에서 열게 된다.



모딜리아니의 나부상은 대략 35점 가량 그려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특히 1917년에 그 대부분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건대, 14살이나 손아래인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사랑이
그를 생명감 넘치는 화가로 다시 재생시켰고 이러한 활기가
그로하여금 정력적으로 많은
나부들을 그리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런데 점차 그의 관심은 온건한 모델에 대한 조용한 애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 있는 裸婦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그것은 여체가 갖는 생명의 비의를 들려 주는 짧고 낮은 소토보체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히려 예술의 신비라고 해야겠다.
사랑과평화의샘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Seated Nude 1913
by Ama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평생 가난과 술과 아편, 그리고 병(결핵)에 시달리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독 속에서 살다가 쓰러진 불우한 화가였다.
1884년 이탈리아 리보르노(Livorno)에서 출생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콕토가 17세의 나이에 조숙한 시인으로 데뷔한 해)
파리로 나와 몽마르트에서 살기 시작했다1908년 처음으로 앵데팡당전에
회화 6점을 출품함으로써 정식으로 화가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그러나 매일매일의 빵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게 된다.


Reclining Nude with Arms Above the Head
by Amadeo Modigliani



똑같은 유태인이며 몽마르트 시대 이래의 예술적 동지였던 막스 자콥 또한
말년의 모딜리아니에게서는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Reclining Nude with Arms Open
by Amadeo Modigliani


왠지 연약하게 느껴지지만, 모든 신경과 감각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은
‘길다란 손’의 모습. 이른바 보들레르가 데생에 대해 정의하면서 ‘
위대한 의지’ 와 ‘섬세성’(<1845년의 살롱>)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막스 자콥이 데생을 가리켜 하나의 ‘형태의 의지’ 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의지’와 ‘섬세성’이, 모딜리아니가 묘사하고 있는 콕토의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Nu Sur Coussin Bleu
by Amadeo Modigliani


모딜리아니는 병과 빈곤과 알콜중독으로 신음하면서도
몽파르나스에서 군림했던 정신적 귀족,
마지막 보헤미안이라 할 수 있다.그의 파란만장한 생활의 에피소드들은
로맨틱한 전설을 만들어 내고, 애수에 젖게 하는
소설 같은 감동적 이야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런 허황한 전설을 꾸며 낸 호사스런
자들을 혐오하고 경멸했을 것이다.
콕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고객을 찾아다니며 즉석에서
비슷비슷한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그런 화가가 아니고 “객석에 앉아서 손금을 보는 존엄한 집시”로서 주문에 의한
초상화 따위는 한 장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눈과 혼과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데생은 ‘말없는 대화’를 나누게 한다.



Seated Nude, Ca. 1917
by Amadeo Modigliani

특히 <파란 상의의 소년>(1918)에 보이는 연약한 섬세성은
일종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이것은 또한
그가 죽기 전에 그린 <자화상>(1919)의 눈과 입가에 떠도는
상냥함과도 상통한다.모딜리아니는
1919년 4월 남프랑스 칸느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1884년 모딜리아니는 유태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으며,소학교 시절 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했던 모딜리아니는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시작했다.
17살이 되던 해에는 폐병이 재발하여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예술적인 잠재력을 유발했다.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브라질의수집)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목과 코를 유난히 길고 굴곡지게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반사해냈다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모델의 분위기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동자도 없는
얼굴이 어떻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살아움직임은 화가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Reclining Nude,

모딜리아니는 여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중 누드화는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길게 그리고 선을 굴곡시키는 등 추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초상화와는 달리
누드화는 현실주의에 가깝다 또한 작품 분위기가 매우 강렬하다.일상생화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술과 마약에 도취되었던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영시키려는
권태로움과 슬픔은 유독 누드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누드화는 유독
친근하고 강렬유한 느낌을 선사한다



초상화중 자신의 아내였던 잔느의 그림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친근함과 강렬함이 누드화에는 생생하게 살아나있다 티없이 아름다운
나체로 부끄러움없이
소파에 적나라하게 누워있는 이 여자는 육체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감정까지도 모두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른하게 누워있지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남겨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세잔느나 달리처럼 자신의 아내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른 초상화에서처럼 기다린 코와 목이 특징적이다
눈동자가 없음에도
관객은 그 눈동자를 읽을 수 있다 검은 머리를 한 잔느가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슬픈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뒷배경이 슬픔을 노래한다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by Amadeo Modigliani



Nudo Femminile di Front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ca. 1918
by Amadeo Modigliani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 de profile
by Amadeo Modigliani



Nu de femme <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Studio di Nudo I

<







사랑할 수밖에 없는 화가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7월 12일 이탈리아 오스카나지방의 리오르노에서 출생 : 1884년
리오르노 중학교 입학. 늑막염을 앓다 : 1895년
풍경화가 미케리에게 데생과 유화를 배움. 장질환으로 폐렴에 걸림 : 1898년
폐결핵에 걸림 (-.-;)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등지를 여행 : 1901년 여행중 접하게된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감명을 받음 피렌체 미술학교에 입학,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이탈리아 고전미술과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품위와
강한 자긍심을 지녔던 모디.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가
혼재하던 유럽의 미술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모색했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집"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평을 듣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열정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비운의 화가





Amadeo modigliani (1884년~1920년)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1920.
1. 24 프랑스 파리.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디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만 알려져 있던 그녀는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에너지와, 자신이 선택에 대해서 후회 없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이 모디를 통해 사랑에의 욕망을 채우고, 예술적 영감과
지적 자극을 얻고자 했던 그녀에게 모디의 죽음은 결국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며 이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을 것이다
.

Jeanne Hebuterne 가 그린 '
잔느'의 초상화들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림]Amedeo Modigliani ◈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Nazareth ◈ Love Hurts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그림]Amedeo Modigliani ◈ Nude with Hat (1907-8)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때로는 몰래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Blonde Nude (1917)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Madame Pompador (1915)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Seated Nude (1917)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 그들의 이야기 천재화가 모딜리아니와
그의 작품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와 그의 연인들,특히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잔느 에뷔테른과의 관계를 둘러싼 수 많은
에피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겨우 몇 명의 도움으로 그가 입원해 있을 때 인근 여관에서 숙박하던
잔느는 베개밑에 면도칼을 두고 잠들었다고 한다. 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
그녀 역시 조금씩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이때 그녀는 스스로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병약했던 상태였다.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형 늑막염이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던져 자살한다.

랄로 작곡 : 노르웨이 환상곡


1.Allegro Non Troppo & 2.Andante
Jacques Thibaud, Violin / Tasso Janopoulo,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