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 헤야 데 헤야 노를 저어라 / 삿대를 저어라
(2절)
낙동강 강바람이 앞가슴을 헤치면 /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 어머님 그 말씀이 수줍어 질 때
에 헤야 데 헤야 노를 저어라 / 삿대를 저어라
6.25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있은지 얼마 안 되는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윤부길씨는 가야장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이었다. 극단 일행은 악양 나룻터에서 지친 몸을 잠시 추스리고 있었다.
함안군 가야면과 대산면엔 5일장 이 섰고 그때 전국을 떠돌던 극단이 장에 모여 든 주민과 상인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쳤던 것. 노래, 춤, 악기연주, 만담 등 TV쇼처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대중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 줬다.
생활에 지친 서민들에게 유랑극단은 마음을 달래주는 청량제로서 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극단사람들은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짐을 챙겨 배를 타게 됐고 어느덧 해는 저물어 저녁 무렵이 됐다. 강을 건너긴 했으나 움직이기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유랑극단 단원들은 전쟁과 가난으로 뱃사공의 집이 폐허로 변했으나 평화로운 정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피난살이와 떠돌이 극단생활로 찌든 일행은 노독을 풀 겸 해서 그곳 나루터 뱃사공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윤 단장 일행은 군에 입대한 오빠(박기중·6·25한국전쟁 때 전사)를 대신해서 두 처녀가 강바람에 치마를 휘날리며 교대로 노를 저어 지나는 길손들을 건네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언니 박말순씨는 23세, 동생 박정숙씨는 18세였다.
나루터 뱃전에서 처녀뱃사공의 이 같은 사연을 듣고 있던 윤 단장은 군에 가서 소식이 끊긴 오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처녀들의 애절함을 ‘낙동강 강바람에,,,,,’란 노랫말로 갈무리했다.
그런 후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악양나루의 아름다운 모습과 처녀뱃사공을 잊지 못해 노랫말을 만든 윤씨가 1959년 한복남 씨에게 작곡을 의뢰해 탄생시킨 노래가 바로 <처녀 뱃사공> 이 다.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 처녀 뱃사공(박말순)은 한창 멋을 부리며 가슴 설레는 꽃다운 나이였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 사공 노릇을 하며 집안 생계를 돕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동생(박정숙)은 나이가 60대 중반으로 경남 창원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물론 작사를 한 윤부길 단장, 작곡가 겸 가수인 한복남 씨 역시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윤 단장은 가수 윤 항기, 윤복희의 부친으로 유명한 음악인이다. 윤항기씨는 몇 년 전 경기도 분당에서 교회목사로 활동하다 서울로 옮겨 종교생활에 열심이다. 그는 노래를 통한 찬양선교로 유명하다. 딸 윤복희씨도 연예 활동보다는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교회 일을 보면서 봉사하고 있다.
악양나루는 1997년 길이 50여m의 악양교가 놓이면서 그 생명을 다했다. 함안군은 이 노래 배경지가 된 곳이 악양 나루란 사실이 알려지자 그곳에 노래비를 세우기로 하고 1999년 가을 2천여 만원을 들여 공사에 들어갔다. 악양루의 빼어난 경치와 <처녀 뱃사공> 탄생 배경을 모티브로 주민이 즐겨 찾을 수 있는 명소로 꾸민 것이다.
함안군은 2000년 10월 2일 함안군민의 날 및 제14회 아라제 행사 마지막 순서로 이 노래의 배경지인 대산면 남강변 악양 나룻터에서 노래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 자리엔 진석규 함안 군수와 고 윤부길 씨의 아들 윤항기 목사가 대신 참석해 눈길을 모았다.
========================================================= 일화 - <울고 넘는 박달재>
<박달재의 전설> 조선 중기, 경상도 청년 박달(朴達)은 한양 과거길에 험준한 고개 아랫마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마침 그날 밤 주인집 딸 금봉이와 눈이 맞아 둘은 사랑을 약속한다. 한양 간 박달은 하세월 돌아오지 않는다. 금봉이는
매일 고갯마루에 올라 성황당에서 기도하지만 결국 상사병이
도져 죽는다.
그리고 딱 3일 후 박달은 낙방거사로 도착한다. 금봉의 사연을 들은 박달이 성황당에 오르자 저만치 앞에 금봉이가 나타났다. 달려가 끌어안으려는 순간 금봉이는 사라지고 박달은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게 된다. 환영을 본 것이었다.
‘비련의 고개’ 박달재는 박달의 이름을 딴 고개(재)로 충북 제천에서 충주와 장호원으로 넘어가는 험준한 산길이다.
<노래 탄생 배경> 반야월(본명 박창오) 선생이 1964년 지방순회공연 차 박달재를 오르다 버스가 고장나 멈췄다. 잠시 산책을 하는데 보슬비가 내리는 저 앞에 젊은 남녀가 애처로운 이별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자 반야월 선생이 여인에게 다가가 사연을 물었다. “남편이 서울로 돈벌러 떠나 잠시 헤어지게 돼 슬프다” 며 가다가 먹으라고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줬다고
했다. 그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몇 달 후 어느날 문득 이 얘기가 생각나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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