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사극드라마 '정도전'이 본격적으로
조선건국 스토리가 시작되며
자체최고시청률을 경신하는 등 인기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 공신이었지만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되기 전까지는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완전히 잊혀졌던
드라마틱하면서 극적인 인물이다.
◇ 유배지에서 '새시대' 조선을 기획한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우왕 재위시절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전라도 나주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유배 생활 중 백성의 삶을 목격한 그는
'심문(心問)','천답(天答)'을 짓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이데올로기로써
성리학을 더욱 연구하고 미래를 준비하였다.
10여년의 귀양살이 후
,
이성계를 만나면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것을 결심한다.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자
개혁세력을 규합한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을 실행했다.
- 프리미엄 조선: 사극 '정도전'에 등장하는 '업둥이'는 픽션
◇ 국호를 '조선'으로 짓다
'고조선의 후예'라는 국사의식을 정립
조선의 '설계자'라고도 불릴만큼
정도전은
수도 선정, 궁궐터 결정, 전각 이름 짓기, 법전 편찬 등
조선 건국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였다.
국호 역시 정도전이 지었다.
그가 쓴
'조선경국대전'에 국호를 정한 내력이 소개되었다.
후보 국가명으로
'화령'과 '조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당시 명나라 천자(주원장)의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사용하라'는 결정에 의해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국 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제사를 지내면서
'고조선의 후예'라는 국사의식을 정립하고자 했다.
- 조선일보: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 수도 한양의 궁궐터를 결정하다
무학대사, 동향으로 짓지 않으면 '장자 계승 어렵고,
큰 액운 있을 것' 주장
실세 정도전, 유교에 근거한 '군자는 남향으로 정치한다'
주장으로 궁궐터 결정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는데 있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등지고 동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장자들이 대대로 잘될 것이라고 하며,
만약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지 않으면 200년을 못 넘겨
나라에 큰 액운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이
'군자는 남쪽을 향해 정치를 한다'고 주장해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궁궐이 남쪽을 향해 들어선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
이 때문인지
실제로 조선왕조에서는 숙종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보위를 물려받아 치적을 이뤄낸 장자가 거의 없다.
또,
개국 200년이 안되어 임진왜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 경복궁 등 모든 전각 이름을 짓다
조선 최초의 헌법서 '조선경국대전'도 편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지도를 보니 전각의 모든 이름이 다 있었다.
그 많은 전각의 이름을
모두 정도전이 지었다는 것을 알게된 대원군은
조선시대 내내 금기시 되었던 정도전을 복권시켜주고
전각의 이름도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경복궁'은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큰 복을 받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따왔다고 한다.
또
사대문 역시 유교 사상인 '인,의,예,지,신'에서 따왔는데,
동대문은 '흥인지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북쪽에 세운 문은 '소지문'(후에 숙정문으로 변경)이라
지었다.
조선 최초의 헌법서인
'조선경국대전' 역시 그의 작품이다.
'조선경국전' 첫 페이지에서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한 것"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고 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정치는 설 데가 없다는
'경국(經國)의 조건'은
정도전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경복궁이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 있는 것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600년 전 정도전은 말했다.
"천자가 관제를 만들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지도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라는 것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회사를 살리기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장이 아니라 소비자이고 종업원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기업인이 있기에
정도전의 '민본' 사상이 새삼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다.
- 조선비즈: [경영 칼럼] 고객 무시하는 사장님들,
정도전에게 배우세요
◇ 태종 이방원에게 제거당한 친구 정몽주와 정도전
고려의 충신으로 유명한 정몽주와는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 사이다.
같은 스승 아래 있었으나
후에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정몽주는
관직에서는 탄탄대로를 달렸고,
반대로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던 정도전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후 정도전은 조선 건국 공신이 되었고,
끝까지 고려 왕조를 지지했던 정몽주는
'단심가'를 남긴 채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프리미엄 조선: 정몽주 모친은 우대받고
정도전 모친은 조롱당한 까닭
하지만
정도전도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운명이었다.
이성계와 함께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지지했던 정도전은
본인이 왕이 되고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게 직접 살해당했다.
그 후 이방원은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조차
못하게막았고,
이후
흥선대원군이 복권시켜 주기까지 50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 조선pub: "드라마 '정도전',
줄 잘 서야 하는 정치인 보여주는 것"
◇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는 '혁명가' 삼봉 정도전
정도전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연구는 계속 되고 있다.
그에 관한 책만해도 수십권이 된다.
조선 왕조 5백년 중에서 가장 진취적이며
지식인으로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 사상과
어리석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
'요동정벌'을 준비하며 명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꿨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후대로 갈수록 다양해진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 역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그가 주창했던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경국의 조건' 만큼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