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이렇게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우리 현대문학사에 빼어난 연애시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시인을 사로잡은 '나타샤'가 누구냐를 놓고 말이 많았다.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사 시절 사랑했던 기생 자야였다는 얘기가 있다.
소설가 최정희는 생전에 백석이 이 시를 자기에게 보내왔다고 했다. 1930년대 중반 최정희와 백석이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함께 근무할 무렵 일이다. 일본 유학파 멋쟁이 시인 백석은 여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백석은 여섯 살 위 최정희에게 프러포즈했다가 받아주지 않자 이 시를 보냈다고 한다. 그즈음 백석은 최정희에게 이런 편지도 썼다. '사람이 사랑하다가 사랑하게 되지 못하는 때 하나는 동무가 되고 하나는 원수가 되는 밖에 더 없다고 하나 이 둘은 모두 다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딘가 서운함이 묻어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나타샤'에서처럼 절절한 사랑으로 이루는 게 문학인지 모른다.
당시 최정희는 도쿄 유학 시절 만났던 연극인 김유영과 이혼한 상태였다. 젊고 예쁜 소설가 곁에 당대 문사(文士)들이 다가왔다. 기자 시절 최정희는 원고 청탁의 명수였다고 한다. 강단도 있었다. 최정희가 인기 여배우 문예봉을 인터뷰해 쓴 기사를 출판부장이 고치고 줄인 일이 있었다. 최정희는 분을 못 참고 부장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최정희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보냈던 문인 중에 시인 김기림이 '우리들의 황홀한 천재'라고 한 이상(李箱)도 있었다. 최정희는 이상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이 귀하게 남은 이상의 편지를 발굴해 엊그제 공개했다.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정희야 이제 너를 떠나는 슬픔을 얼마든지 참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상은 '나는 진정 네가 좋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가 좋다'고 했다.
이상은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이복동생 변동림을 만나 살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 최정희는 '파초'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해 지원·채원 자매를 소설가로 키웠다. 이상이 죽기 한 달 전 쓴 소설 '종생기'는 주인공이 '정희'다. 소설에선 정희가 주인공 '이상 선생'을 사랑하고 러브레터를 보낸다. 일본 어느 문인은 "작가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사랑이 문학의 영원한 모티프라는 말을 이상의 육필 연애편지를 보며 다시 떠올린다.
- 조선일보 만물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