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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녀와 3대 악녀

素彬여옥 2014. 8. 7. 23:19




  
중국 4대 미녀와 3대 악녀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history 는 ‘그의 이야기’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대를 움직인 역사 속의 인물들 중 대다수가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역사 속의 여인들은 때로는 아름다운 미모로 권력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혹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여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여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대 미녀
 
  
경국지색의 주인공 서시(西施)

  
중국의 4대 미녀 중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서시. 
서시는 춘추전국시대 말, 월(越)나라의 미녀이다. 
하루는 그녀가 강변에 있는데 맑고 투명한 물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수중에 있던 물고기가 
그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녀의 미모에 비단 물고기만 놀란 것이 아니다. 
당시 오(吳)나라의 왕 부차와 월(越)나라의 왕 구천이 싸우던 중 
구천이 패하게 되어 항복하고 부차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구천은 치욕을 씻기 위해 뛰어난 미모를 소유한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미인계를 쓰고,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빠져 국정은 돌보지 않고 정치를 태만하게 한다. 
그 틈을 타 구천은 부차를 공격하여 오나라를 패망시킨다. 
오나라가 패망한 뒤 서시는 구천의 후궁이 되어 총애를 받지만 
구천의 정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이자 영웅호걸들의 애간장을 녹인 장본인 서시. 
아름답고 화려한 외면 속에 남모를 슬픔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인계란 바라는 목적이 있을 때 아름다운 여인으로 하여금 
상대를 유혹하게 하여 뜻하는 바를 성취하는 건데 
이를 저속하게는 ‘성 상납’이라고 표현한다. 
여자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단지 임무와 사명감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몸까지 허락해야 하는 비운. 
서시와 같은 인물이 오늘날에도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뇌물을 주지 못해 추녀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왕소군(王昭君)
 


 
  
한(漢)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두루 갖춘 팔방미인이다. 
당시 한나라의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초상화를 보고 아름다운 궁녀를 골라 총애하였다. 
궁녀들은 자신들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앞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그러나 가난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못해 본인의 
외모와는 상반되는 미운 초상화가 그려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화친을 위해 북쪽 흉노왕에게 궁녀를 보내려던 원제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뽑아서 보내도록 하였다. 
원제는 이별의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왕소군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미모에 반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흉노왕에게 보내고 만다. 
결국 그녀는 흉노왕의 아내가 되어 싸움이 빈번하던 두 나라를 
50년 이상 원만한 관계로 유지시킨다. 
현대 중국인들은 왕소군을 고대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앞서 궁녀들이 화공에게 자신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치는 모습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뇌물수수는 
가장 만연하게 행해지는 비리인 듯하다. 
그래서 그만큼 더 뿌리뽑기 힘든 부정행위이다.
 비록 가난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질 못해 
오랑캐의 땅으로 보내졌지만 탁월한 국정능력을 보여주었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지도자의 양상인지도 모르겠다.
  
여포와 동탁의 그녀 초선(貂蟬)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유일한 가상인물이다. 
초선은 삼국지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漢)나라의 대신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우자 그 모습을 본 왕윤은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네.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 라고 말해, 
이 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양아버지였지만 초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고, 
그녀 또한 그를 잘 따랐다. 
훗날 초선은 왕윤의 부탁을 받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의 계략을 실행에 옮긴다. 
미인계를 써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켜 서로 질투하게 하고 
배신하게 하여 결국 여포로 하여금 섬겨야 할 주인인 동탁을 
칼로 베어 죽이게 한다.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초선 또한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아름다운 여자는 수명이 길지 않거나 운명이 기구하다더니 
‘미인박명’ 은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비록 남들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누구보다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동탁은 권력의 찬탈과 폭정으로 후한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분열시키는 등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터였다. 
다들 동탁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맞서 싸우는 이는 없었다. 
그 찰나 초선이 개입돼 동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부탁이라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한 말 ‘폭정’과 ‘ 권력찬탈의 쿠데타’를 멈추게 한 
1등 공신은 초선이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절세미인 양귀비(楊貴妃)

 자질풍염’미인으로 유명한 양귀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며,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본래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수왕의 비로 
17세 때 궁에 들어왔으나 시와 노래에 뛰어난 보기 드문 절세미인으로 
현종의 눈에 들게 되어 간택되었다. 
현종이 양귀비를 무척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딸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은 재상이 되었다. 
한편 돌궐족 출신인 젊은 장군 안녹산은 양귀비가 무척 예뻐하던 양자였는데,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된다. 
양국충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자 안녹산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안녹산이 ‘안사의 난’ 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수도가 점령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고, 
도망가던 중 현종의 친위병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하라고 현종에게 제기한다. 
목숨과 사랑 중 목숨을 택한 현종은 결국 양귀비를 처형하는데 동의하고 
양귀비는 자결 아닌 자결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기적이고 대범하지 못한 남자였다. 
어찌 보면 본인이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정치를 소홀히 한 과실을 
양귀비에 떠넘긴 비겁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현종은 소싯적 정치에 꽤나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장본인이지만 
양귀비에게 빠지면서부터 점점 정세가 기울게 된다. 
나아가 ‘양국충’과 ‘안녹산’을 비롯해 양귀비의 일가친척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게 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한 국가는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있다. 
혹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등외] 몸도 마음도 가벼웠던 조비연(趙飛燕)
  
아쉽게 중국의 4대 미녀에서 탈락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비연이다. 
‘연수환비(燕瘦環肥)’, 즉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항상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조비연은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명인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다. 
뛰어난 몸매와 가무로 그녀는 한(漢)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힘만으로 지위를 지키는 것이 벅차게 되자 
동생인 조합덕을 불러들인다. 
언니와는 달리 풍만한 몸매를 지녔던 조합덕은 성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이를 질투한 조비연은 욕정을 풀기 위해 외간남자들을 불러들여 정을 통한다. 
하지만 임신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던 그녀는 임신을 한 후비들을 살해하거나 
그 자식들을 살해한다. 
훗날 성황제가 죽자 지지 기반을 잃은 조비연은 황후에서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고 끝내 자결하고 만다.
조비연이 4대 미녀에서 탈락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악덕 행위과 가벼운 행동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올곧은 품성과 마음가짐을 가진 자로서 도덕적으로 행동했더라면 
황제가 죽었다 한들 그녀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전히 황후의 자리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던 그녀는 
유일한 지지 기반을 잃게 되자 권력도 잃고 
그 동안의 죄값을 치르게 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한 듯하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빠뜨리지 않고 벌을 내린다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악덕하고 부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 대 惡女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 달기(妲己)
  
중국 역사에 대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악녀의 아이콘’ 
달기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기는 중국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으로 
미모가 아주 빼어났다고 한다. 
달기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주왕은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의 ‘주지육림’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겨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포락형’을 내렸다. 
‘포락형’ 은 구리 기둥 위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다. 
달기는 주로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얻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자료에 달기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윤리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 이라고도 한다.
달기라는 여인이 실존인물이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달기가 주나라의 ‘명분’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이라면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윤리적 타당성을 위하여 또 다른 윤리가 퇴색되어 버리는 일,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돼지를 만든 여태후(呂后)
  
여태후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조강지처로,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부터도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왔다.
한나라가 안정을 찾자 여태후는 장래에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한신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하나씩 ‘처리’ 해 나갔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토사구팽’ 의 유래이다. 
유방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자, 
여태후는 본격적으로 악랄함을 드러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 자신의 권력을 넘보았던 유방의 첩 
척부인을 잡아다가 팔다리와 두 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아버린 뒤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여 변소에 던져 놓았다. 
그도 모자라 척부인의 아들 혜제에게 보여주며 
‘사람돼지’ 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 후로도 여태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씨 일족을 왕후로 책봉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태후의 ‘국정 운영’ 능력이다. 
그녀는 악녀 중의 악녀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민생안정 정책을 강화하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사회를 점차 안정시켰다. 
그녀는 개인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정책만큼은 유토피아를 꿈꿔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통치자 혹은 CEO가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만약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결단력이 남다른’ 통치자나 CEO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권력을 위해서 친자식도 살해한 측천무후(則天武後)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 많은 역경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 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서태후.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함풍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된 후부터 
그녀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함풍제의 본처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함풍제가 죽은 뒤 서태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고 
황후 간택 문제에서 조차 동태후의 선택을 따랐다. 
서태후는 그 ‘억울함’을 사치스러운 생활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이니 
동양의 ‘마리 앙투아네트’ 라는 칭호가 걸맞겠다. 
이 여인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청일 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몰락하건 말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곧바로 죽여버렸다. 
결정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청나라를 궁지에 빠지게 하면서 
역사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를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외로운 여인’ 으로 
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악녀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을 이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날마다 진수성찬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가 때로는 너무나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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