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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 最初의 西洋畵家 羅蕙錫과 그녀의 3남 김건 한은총재

素彬여옥 2015. 5. 11. 08:12





行旅病者로 숨진 韓國 最初의 西洋畵家 羅蕙錫



지난 4월17일 김건(金建 1929-2015) 전 한국은행 총재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86세. 짧은 부음(訃音)의 뒷부분이 눈길을 끕니다. "고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고 나혜석(羅蕙錫·1896~1948)씨의 셋째 아들이다…." 역사의 시계추를 67년전으로 되돌려봅니다.

1948년 12월10일 밤 8시30분, 신원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사망했습니다. 지금의 이태원이 아닌 옛 용산구청 근처의 자제원(慈濟院)이었습니다. 그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羅蕙錫이었습니다. 羅蕙錫은 김우영(金雨英 1886-1958)과 결혼해 3남1녀를 낳았습니다. 金雨英은 얼마전 사망한 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의 아버지로, 羅蕙錫과의 사이에 맏딸 김나열을 비롯해 金宣(12살 때 병사)-金辰(전 서울법대교수)-金建(한은 총재) 등 3남1녀를 낳습니다.

수원시에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돼있다. 그녀의 사진과 연보와 동상 등이 들어서 있다.
수원시에는 羅蕙錫 거리가 조성돼있다.
그녀의 사진과 연보와 동상 등이 들어서 있다.

羅蕙錫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경기도 수원을 다녀왔습니다. 羅蕙錫은 그곳이 고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팔달구 수원행궁(行宮) 화령전(華寧殿) 앞 신풍초등학교 후문 근처로, 집터에 기념비가 서있었습니다. 羅蕙錫의 선친 나기정은 용인군수를 지냈습니다. 고관 출신 답게 집터가 왕궁 바로 옆의 좋은 위치였으며 부근의 동네 도서관에서는 마침 '나, 羅蕙錫'이라는 전시를 하고있었습니다. 수원에는 이밖에도 羅蕙錫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羅蕙錫 거리'지요.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羅蕙錫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있습니다. 주변은 온통 먹자골목이어서 대체 왜 이곳을 '羅蕙錫 거리'로 정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혜석 생가 부근 마을 도서관 2층에서 열리는 '나도 나혜석' 전시회.
羅蕙錫 생가 부근 마을 도서관 2층에서 열리는 '나도 羅蕙錫' 전시회.

나혜석 거리에는 좌상과 함께 입상(立像)도 있는데 얼굴 생김이 사뭇 다르다.
羅蕙錫 거리에는 좌상과 함께 立像도 있는데 얼굴 생김이 사뭇 다르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羅蕙錫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진명여고보를 졸업한 뒤 조선인으론 처음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유학갔는데 서양화를 택한건 오빠 나경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때부터 羅蕙錫은 불같은 사랑을 합니다. 첫 상대가 오빠의 친구 최승구였습니다. 최승구는 1916년 폐결핵으로 고향 전남 고흥에서 요절했습니다. 羅蕙錫이 문병 다녀간 다음날이었다지요. 둘의 사랑은 비극적이었습니다.

최승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집안에서 맺어준 본처가 있었지요. 최승구는 동경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간여했지만 나경석은 그의 불우한 환경을 꺼려 교제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경에서 약혼까지했던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羅蕙錫은 한동안 신경쇠약증세를 앓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羅蕙錫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혜석의 생가는 수원행궁 부근 신풍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다. 지금은 그곳이 생가임을 알리는 비석만 세워져 있다.
羅蕙錫의 생가는 수원행궁 부근 신풍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다.
지금은 그곳이 생가임을 알리는 비석만 세워져 있다.

두번째 상대 김우영(金雨英·1886~1958)은 부산 출신으로 교토(京都)제대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 역시 1916년 첫 부인과 사별(死別)했다고 합니다. 그가 羅蕙錫을 만난 것은 1917년입니다. 나중에 金雨英은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됩니다. 金雨英이 조선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18년인데 처음에는 반일(反日) 변호사처럼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붙잡혀간 연인 羅蕙錫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올 정도였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그는 자치론(自治論)에 경도(傾倒)됩니다. 자치론이란 일본의 식민지이되 자치권을 가지면 만족한다는 일종의 타협 노선인데 그와 비슷한 논리를 편 이들이 설산 장덕수와 훗날 연적(戀敵)이 되는 최린(崔麟 1878-1958)입니다.

나혜석 거리의 안내문은 그녀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독립운동가임을 밝히고 있다.
羅蕙錫 거리의 안내문은 그녀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독립운동가임을 밝히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
http://premium.chosun.com/data/2015042104117.html
2015.04.22

有婦男이던 春園 李光洙와 사랑에 빠지고

金雨英과 羅蕙錫의 러브스토리를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할 이가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입니다. 춘원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갑니다. 고등예과에 편입한겁니다. 1905년에 이어 두번째로 성사된 춘원의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진 것인데 춘원은 일본에서 만난 羅蕙錫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꿉니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습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기'인데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습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이었던걸 알았던 거지요. 羅蕙錫 역시 최승구 사후 얼마되지않아 金雨英과 춘원 사이를 오갔지요.

자꾸 이야기가 샛길로 갑니다만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도 대단했습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입니다. 춘원은 백혜순과 이혼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제물포항에서 중국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요.

다시 金雨英-羅蕙錫으로 방향을 돌려봅니다. 1920년 두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羅蕙錫은 4가지 결혼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걸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지요.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둘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줄 것. 더 놀랍게도 金雨英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줍니다. 두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왔습니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입니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남편 金雨英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혜석 거리의 상점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 한점씩이 걸려 있다.
羅蕙錫 거리의 상점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 한점씩이 걸려 있다.

비석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이동 집에서 차린 것입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결과적으로 羅蕙錫의 불륜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羅蕙錫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요.

첫째 羅蕙錫은 너무도 똑똑했습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습니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둘째 羅蕙錫이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명이 넘지않았다고 하지요. 셋째 어머니의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합니다.

羅蕙錫은 유학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이런 글을 국내외 잡지에 씁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

金雨英과 결혼한 직후 羅蕙錫은 화가로서 짧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결혼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여 인파가 몰렸으며 70여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린 겁니다. 여기엔 변호사인 남편의 후광이 있었겠지요. 이 개인전은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전(油畵展)이었는데 이후 羅蕙錫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됩니다. 그런 두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길이 파탄을 가져온거죠.

나혜석은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인형의 가(家)'라는 시를 지었다.
羅蕙錫은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인형의 가(家)'라는 시를 지었다.

둘의 여행루트는 지금봐도 대단합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로 간 겁니다. 여행은 남편 金雨英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겁니다. 羅蕙錫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유럽에서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됩니다.

처음에 부부는 여행을 떠날 때 서너달 정도로 예정됐지만 여행은 1년8개월이나 이어집니다. 안타깝게도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의 앞에 천도교 교령 崔麟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릅니다. 崔麟은 3·1운동의 대표 33인에 포함된 인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후 천도교에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崔麟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나혜석의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자신의 시가 새겨진 비석 옆 좌석에 놓여있다.
羅蕙錫의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자신의 시가 새겨진 비석 옆 좌석에 놓여있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이지요.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일본의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崔麟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崔麟과 羅蕙錫은 "서로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맙니다. 그해 11월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두사람은 본격적인 불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사람은 통역을 고용해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안뜨일리 없고 말이 안나올 수 없지요. "羅蕙錫이 崔麟의 '작은 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은 독일에 있던 金雨英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金雨英은 羅蕙錫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崔麟과의 불륜장면을 목격하지요. 金雨英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릅니다만 그것은 두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여정(旅程)입니다. 그렇다면 崔麟은? 崔麟은 羅蕙錫이 金雨英과 1930년 이혼한 뒤 羅蕙錫에게 흥미를 잃습니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하자 羅蕙錫은 가만히 있지않고 崔麟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崔麟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羅蕙錫에게 주고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한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겁니다. 羅蕙錫의 대담함은 여러군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羅蕙錫은 崔麟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崔麟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는군요.

나혜석의 생가 근처 아트센터 벽에 새겨진 나혜석의 자화상. 그 밑에는 남녀노소가 타일에 새긴 글귀가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羅蕙錫의 생가 근처 아트센터 벽에 새겨진 羅蕙錫의 자화상.
그 밑에는 남녀노소가 타일에 새긴 글귀가 붙어있어 눈길을 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
http://premium.chosun.com/data/2015042104135.html
2015.04.22

南便에게 離婚 當하고 不倫男에게 訣別 當하고

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金雨英-羅蕙錫은 1929년 3월 귀국했지만 둘은 예전같은 관계가 아니었죠. 金雨英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있었습니다. 羅蕙錫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습니다. 羅蕙錫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사온 며느리를 구박한겁니다. 羅蕙錫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습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崔麟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겁니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崔麟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金雨英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합니다. 羅蕙錫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습니다. 金雨英은 이혼 넉달후 재혼하고 崔麟은 앞서 쓴 것처럼 羅蕙錫과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 羅蕙錫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집니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는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나혜석도 인습과 성차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羅蕙錫 거리에 있는 조형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羅蕙錫도
인습과 성차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1935년을 전후로 羅蕙錫은 몰락합니다. 작품전 실패-맏아들의 죽음-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습니다. 이후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습니다. 羅蕙錫의 삶은 파란만장해 그것을 짧게 정리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金雨英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했습니다.

"중 2학년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羅英均(1926-  ) 전 이대 교수도 羅蕙錫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교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지요. 이렇게 방황하던 羅蕙錫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됩니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羅蕙錫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미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제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金雨英, 불륜남 崔麟, 이루지못한 사랑 李光洙-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혜석 거리의 초입에 세워진 구조물 밑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羅蕙錫 거리의 초입에 세워진 구조물 밑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金雨英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고 崔麟과 李光洙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버렸지요. 반면 羅蕙錫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羅蕙錫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은 20일 아침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金建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羅蕙錫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준 것입니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시절 그를 찾아 "羅蕙錫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답니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羅蕙錫 선생 기념에 써달라"고 했지요.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는군요.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됩니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羅蕙錫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羅蕙錫 거리'입니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羅蕙錫의 넋이 거기 살아있습니다.

文甲植 편집국
1962년생,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연세대 행정학석사와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
1988년 조선일보에 입사, 편집부-스포츠부-사회부-정치부. 논설위원-기획취재부장-스포츠부장.현재 선임기자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
http://premium.chosun.com/data/2015042104138.html
201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