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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기행 [로저 세퍼드/] ★

素彬여옥 2015. 10. 8. 09:26

 

 


★ 백두산 기행 [로저 세퍼드] ★

 

"백두대간 산 중에서 어느 곳이 가장 마음에 들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물었다. 수많은 산과 산이 만나 줄기를 이룬 저 거대한 백두대간에서 어떻게 하나를 콕 집어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확 잡아끈 산이 궁금했다. 

"최고의 산은 내가 가야 할 산이야. (Best mountain is next mountain.)"

남북 백두대간을 종주한 로저 셰퍼드(49. 뉴질랜드)는 정답이 없는 질문에 이렇게 응수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크든 작든 모든 산은 고유한 개성을 뿜어낸다는 게 그의 말이다.

북한 쪽에서 본 백두산과 천지. ⓒ로저 셰퍼드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다 보여주길 꺼리는 산이 있다. 높고 큰 산은 대개 그러하다. 인간은 그런 산을 경외하며 그 산 어디쯤에 신성한 존재가 살고 있을 거라고 믿곤 했다. 한반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산과 공존해왔다.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 그 산에 다녀온 뒤 로저는 자기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자연의 놀라움..내 인생에서 아직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을 본 적 없다."

지금 이 순간, 남한에 사는 우리가 갈 수 있는 북한의 산은 백두산뿐이다. 같은 한반도에 있는 산이지만 중국으로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힘들게 가도 백두산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바라보는 우리의 산이 온전히 보일 리 없다.

백두산의 모습. ⓒ로저 셰퍼드


백두산은 이 땅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두 발로 개마고원과 백두고원을 거쳐 올라야 제 맛이 아닐까? 우리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방인' 로저가 먼저 했다. 대신 그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북한 쪽에서 본 백두산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평양에서 차로 꼬박 이틀을 달렸다니까. 첫날은 함흥에서 자고 둘째 날, 백두산 근처로 갔어. 그렇다고 뭐 백두산이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쉽게 사람을 허락하겠어?"


평양에서 백두산으로 향하면서 차에 짐을 가득 실었다. ⓒ로저 셰퍼드


로저 일행은 2012년 6월 평양에서 쌀, 빵, 통조림 생선, 땅콩, 도토리소주 두 박스, 생수 등 짐을 가득 싣고 출발했다. 길은 멀고 험했는데, 날씨가 더 문제였다. 처음 백두산에 도착했을 땐 짙은 운무탓에 아예 다른 산으로 여정을 바꿔야 했다.

외유를 끝내고 돌아와도 백두산의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다. 호텔에서 대기하던 로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로저 일행을 안내하는 운전기사 한명수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로저가 2011년 평양을 찾았을 때 한명수는 호기롭게 약속했다.

백두고원 삼지연 인근의 모습. ⓒ로저 셰퍼드


"로저 동무, 백두산에 가봤어? 다음에 또 오면 내가 꼭 백두산 일출을 보게 해줄게!"

호텔에서 도토리소주를 마시던 6월 19일 저녁이었다. 비바람이 호텔 창문을 때렸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아니면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서였을까. 소주 한 잔 들이킨 한명수가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짙은 운무가 낀 백두산과 천지. ⓒ로저 셰퍼드


"이봐 로저, 내가 운전할 테니 내일 새벽에 한 번 가보자고. 계속 이렇게 대기할 순 없잖아? 하늘이 열릴 수도 있으니, 어쨌든 시도는 해봐야지."

북한 양강도 공무원 방령, 조선-뉴질랜드친선협회에서 일하는 황승철, 황철영은 말없이 한명수를 바라봤다. 눈빛이 '오버하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다. 심각해진 방령이 나섰다.

"거 참 알 만한 사람이..백두산이 동네 뒷 산입니까? 지금 저 비바람 소리 안 들려요? 괜한 욕심 부리면 큰일 납니다. 위험한 일은 시작도 하지 마세요."

한명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이겼다. 일단 가보기로 했다. 로저는 다음날 새벽 1시에 눈을 떴다. 다행히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로저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흐린 게 분명했다.

짙은 운무 속의 백두산 대피소 모습. ⓒ로저 셰퍼드


로저 일행을 태운 차는 약 1시간을 달려 검문소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급경사 길이 시작된다. 검문소 직원은 길을 막았다. 창문을 내리자 백두산을 흔드는 바람이 요란했다. 직원과 한명수는 고함치듯이 이야기했다.

"지금 위험해! 돌아가시오!"
"문 열어봐! 일단 가볼게요! 아침이면 좋아지겠지!"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양강도 공무원 방령의 힘이었는지, 아니면 로저 일행의 고집이 워낙 완강했기 때문인지 직원은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30분을 더 달리자 백두산 기슭에 도착했다.

"정말 사나운 짐승같은 바람이 불더라고. 순식간에 운무가 몰려오고 비도 쏟아지고..두 발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니까. 사실 돌아보면 모든 게 멍청한 짓이었어. 검문소 직원 말이 맞았어. 고집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고."


백두산 인근 백두고원의 모습. ⓒ로저 셰퍼드


로저 일행은 차에서 내릴 엄두를 못 냈다. 차의 헤드라이트 빛이 운무에 반사돼 1~2m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백두산 어느 기슭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 남자 네 명은 모두 겁 먹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들의 오만함을 자책하면서 차 안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해가 뜨면 혹시 날이 맑아질 수도 있다는 희미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게 다 술 때문이었어! 전날 밤 술 기운에 다들 만용을 부린 거라고."

도토리소주가 부른 만용은 참담하게 끝났다. 날이 밝아도 짙은 운무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명수는 차를 조심조심 몰아 호텔로 돌아갔다. 여전히 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감하게 전진했다가 말 없이 후퇴한 넷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부족한 잠을 청했다. 

백두산 천지. ⓒ로저 셰퍼드


결국 시간이 약이다. 로저 일행은 하루를 더 호텔에서 보낸 뒤 백두산으로 향했다. 이번 여정에서 세 번째 도전이다. 이번엔 산이 허락했다. 하늘도 열렸다. 차에서 내린 로저는 백두산 분화구 쪽으로 빨리 걷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착하니 하늘처럼 땅도 열렸다.

백두산 천지. ⓒ로저 셰퍼드


백두산 천지. ⓒ로저 셰퍼드


백두산 천지. ⓒ로저 셰퍼드


"하늘빛의 천지를 보고 깜짝 놀랐어! 실제로 보니 엄청 크더라고. 땅에도 하늘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정말 최고의 순간이었어."

로저는 종일 백두산 천지 주변 봉우리와 고원에서 사진을 찍었다. 쉽게 열리지 않는 하늘과 땅이 아닌가. 로저는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에도 올랐다. 그의 사진을 보니 정말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듯하다. 

백두산 장군봉. 백두산에서 가장 높다. ⓒ로저 셰퍼드


로저 일행은 다음 날에도 백두산에 올랐다. 이번엔 천지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천지의 물은 맑고 깨끗했다. 로저는 두 손을 모아 천지의 물을 떠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속이 찌릿했다. 로저는 몇 번 더 물을 들이켰다.

깨끗한 백두산 천지의 물. ⓒ로저 셰퍼드

저 멀리 중국 쪽 백두산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로저는 한국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로저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설픈 한국말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백두대간 좋아요! 남북 통일!"


왼쪽부터 백두산 장군봉에서 만난 북한 주민들. ⓒ로저 셰퍼드


백두고원에 선 로저 셰퍼드. ⓒ로저 셰퍼드


※덧붙이는 글※

로저의 백두대간 사진전이 오는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립니다. 해방 70주년을 맞아 백두대간 사진 70장을 전시할 예정입니다. 로저는 최근 개성공단을 방문해 이 사진을 육로로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와 북한 측은 로저의 계획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8.15 광복절에 앞서 개성공단에서도 사진전을 여는 방안도 논의했습니다. 통일부만 허락하면 모든 일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통일부가 불허하면 남북 백두대간 사진은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옮겨집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평양에서 남북 백두대간 사진전이 개최되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후원은 사진전 개최에도 쓰입니다. 고맙습니다.

로저의 감사 인사를 마지막 기사에서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