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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을 잊은 그대에게 ㅡ사색의 즐거움

素彬여옥 2010. 6. 3. 10:01
 

 

장재선(jeijei2)




한 노배우를 통해 독서와 사색의 의미를 되새겨본 적이 있습니다. 국민 배우로 칭송받는 그는 후배들이 가까이 하기엔 큰 어른이지만, 평소 소탈하고 겸허한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을 평안하게 대합니다. 기자의 지인은 어느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던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방 앞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의 질박함은 천품이겠으나 독서를 통한 자기 연마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늘 책을 가까이 합니다. 얼마 전 끝난 주말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는 촬영장의 휴식 시간에도 꼭 책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조은 시인의 신작 시집 ‘생의 빛살’을 봤는데 언어의 맛이 참 좋았으나 뜻을 다 이해하기는 내 실력으로 안 되더라”는 솔직한 감상을 전하더군요. 그는 며칠 전에 서점에서 박범신씨의 소설 ‘은교’를 사면서 가슴이 설레었다며 웃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그처럼 책을 가까이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재테크 서적이나 업무에 필요한 실용서가 아닌 책을 읽고 세상에 대한 사색을 하라고 권한다면 말 그대로 사색이 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한국의 중년들은 치열한 경쟁의 시장에서 지친 몸을 쉬기 위해 TV 리모컨을 돌리는 데 익숙합니다. 시청자의 사고를 가로막는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든 말든, 생각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것이 우리 시대 직장인들의 솔직한 토로입니다. 하지만 TV에서 40여년이나 톱스타 자리를 지켜온 노배우의 말은 찬찬히 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극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인생을 제대로, 즐겁게 사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깨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신간 서적 중에 ‘사색의 즐거움’(이다미디어 발행)을 눈여겨본 것은 그의 말이 준 여운 덕분입니다. 현대판 루쉰으로 불리는 중국 작가 위치우위(余秋雨)가 독서를 통해 얻은 사상, 철학, 인생관을 명상록 형식으로 적은 글모음입니다. 이런 유의 책은 현대인의 독서 경향에 맞춘 요약판 어록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위치우위는 동서고금의 역사·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있는 독서의 조각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사색한 후에 얻은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그의 사로(思路)를 따라가면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의 묘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과학사의 찬란함을 서양에 소개한 영국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의 저술 작업에 대한 사색이 그 한 보기입니다. 중국인들은 니덤의 책에 마냥 흐뭇해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중국인이 아닌 영국인이 지었다는 것에 시선을 둡니다. 또 니덤이 중국의 과거에 대해 책을 쓰던 그 시기에 영국은 인류에 기여할 새로운 발명품들을 쏟아내며 미래를 향했던 것을 상기합니다.

번역자인 한문학자 심규호·유소영 부부가 말한 것처럼 위치우위의 글은 향기로운 역사나 문화 이외에 폐허와 유배지, 또는 쓸쓸한 변방을 거니는 고독한 발걸음입니다. 그는 세상과 삶의 겉모습에 감춰진 어떤 것에 대해 사색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진실한 애정으로 보듬습니다. 중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중적 명성을 얻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서 분노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위치우위의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인생을 얼마나 풍성하고 의미있게 만드는 일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의 사색을 만나면 온갖 희로애락에 시달리면서도 한 세상을 기어이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새삼 애틋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