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모음/감동 글,그림 모음

[스크랩] 탕!-땅!-경성장안에서 살벌한 총소리가 들렸다!

素彬여옥 2012. 2. 21. 19:43

 


탕!..따~땅!..피~웅!..땅!땅!땅!..따~앙~!

대낮에 경성장안에서, 갑자기 살벌한 총소리가 들렸다!


그 총소리는 일제(日帝)-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이 있는 쪽에서 들려왔다.


따!~따!~따!...탕!..탕!..땅!...타~아~앙~!

드디어 왜놈순경들과 혈전이 시작됐다~!

 

조선부업협회잡지-기자인, 다 까기(古木 吉 江:35)가 황금정(*을지로)에 있는 동양척식회사수위실에서 잠깐 들려 신문을 보다가, 낮선 불청객이 들어오자, 누구냐고 물자마자, 2방에 총알이 가슴을 뚫는 대답으로 돌아와, 그 자리에서 벌렁 나뒹굴었다.


....탕!...땅!....

- 이때였다.  2층으로 막 올라가던, 다께 지(武 智 光:22)는 수위실 쪽에서 회사현관에서 총성이 들리자 현관으로 되돌아 내려오는데, 날렵하게 다가오는 불청객으로부터,  갑자기 2방에 총알이 날아와 그중 한방이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곧장 아래 계단으로, 때그르르 굴러 떨어지면서, 고꾸라졌다.


....타!..타!..탕!....따~앙~!

- 권총을 쏜 쭝궈(中國) 옷차림에 장년은,  빠르고 가볍게 현관을 통해 2층으로 범처럼 빠르고 가볍게 올라갔다. 그는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토지개량-사령부가 있는 사무실문을 열어 재꼈다, 의자에 앉아 있던 기술과장인 아야 다(綾 田 豊:45)가 깜짝 놀라 뒤돌아다보는 순간에, 그 가슴을 겨누어 또 한방을 쏘았다. 총알을 맞은 기술과장은  고개를 아래로 숙기면서, 맥없이 푹 쓰려졌다.


그런 순간에 오른쪽에 앉아있던 기술반장 오오모리(大 森 太 四 郞:38)가 막 일어서려고 하자, 불청객은 그에게도 가슴, 쪽에다 대고 한방을 쏘아 거꾸러트렸다. 권총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빠르고 정확히 쏘았다.


오오모리(大 森 太 四 郞:38)가 쓰러진 바로 그 옆에 앉아있던 젊은 사원은, 그사이에 열려져 있던 유리창문밖으로 뛰어내려,.,똥줄이 빠지도록, 현관정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불청객인 쭝궈(중국)-옷차림에 장년은 도망가고 있는 그를 잠깐 돌아다 본 뒤에, 다음 사무실문을 열고선, 허리춤에서 주먹만한 폭탄(*수류탄)을 꺼내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안정장치를 빼지 않고선,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쏜살같이 계단을 통해 현관 밖으로 나가, 현관을 통해 정문으로 도망가는, 그놈을 바짝 따라가 1한방을 쏘았는데, 대번에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거꾸러졌다!


....탕!....탕!.....따~땅~!

- 수위실 쪽으로 다시 가까이 온, 쭝궈(중국)-옷차림에 젊은이는 동쪽으로 난 옆길로 빠져나가, 동양(조선)철도주식회사인 뒷문을 통해, 조금 전에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로 들어간 것처럼  현관이 있는 쪽으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그러자 현관에 앉아있던 마쯔 모또(松 本 筆 一:60)와 천진당[天眞堂]-시계점원인 기무라(木村 悅 造:29)가 빤히 바라다보고선, 얼른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들에게도 각각 한방씩 쏘아 거꾸러트리고선, 길거리로 막나오고 있었다,


그사이 총소리를 듣고, 맨 먼저 헐레벌떡 뛰어오던, 경기순찰서 순사인 다바 다(田 咽 唯 次:35)가 마구잡이로 덤벙대며, 오른손을 뻗쳐 움켜잡으려했다. 그러는 찰라! 그 이마에 대고 번개처럼 빠르게 한방을 갈겼는데, 너무나도 가까이서 맞아, 그 자리에서  벌렁 고꾸라져 즉사했다.


...따~아~앙~!..따~타~땅!~피~웅!~따!따!따!탕!탕!탕!탕!..!

- 경시청-순사들이 그사이 벌-떼처럼 몰려왔다. 아오 끼(靑木)∼요 꼬다(模 田)∼후루 까와(吉 川 唐 峯)∼노구 찌(野 口)∼그리고, 조선인 친일파순경, 박용하(朴容夏)들이, 맨 선두에 서서 달려왔다,


그들은 길거리에 엎드리거나 건물-모서리에 숨어서, 되나 못나, 저쪽 거기 어디쯤, 대강대강 어림짐작으로 대고선, 마구잡이로 갈겨대고 있었다.


따~따~땅!탕!~탕!~땅!~땅!...핑!~피웅!..따!따!탕!탕!탕!탕!


그사이에 한 10분쯤이 흘렀다.

그때쯤이었다.

쭝궈(中國)옷차림에 장년도 맞받아, 총을 쏘면서 길거리로 빠져 나와, 외곽지대로 날렵하게 물러나고 있었다.


- 이날은 유달리 청명한 겨울날씨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요란한 총성으로 경성장안(서울한복판)에서 시가전이 살벌하게 벌려져, 귀가 따갑도록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나면서부터, 온통 시끌벅적해졌듯, 난장판으로 되어버렸다.

주변 길거리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피비린내 나는. 섬뜩한 혈투전장으로, 돌변했기 땜이었다. 이런 때에 어디선가 강아지새끼가 아무데나 대고, 실없이 멍!~멍!~멍!...짖는 소리만이 가끔씩 들려왔다.


....땅!~타~탕!...타~아~앙~!...?...??....???...

...하마...그사이에 2시간쯤이 흘러갔다.

경성시내-외곽에 있는 밭도랑에 엎드려, 일본제국-순사들과 혈전을 벌여왔던, 쭝궈(중국)옷차림에 장년은, 마지막 남은 3개에 총알을...가슴에다 대고 쏘았다. 그리고 장년에 사나이는 이날 맑은 겨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하늘에 어머님얼굴과 해맑게 웃는 아내에 얼굴이 차갑게 떠가는, 하얀 뭉게구름사이로 어릿어릿 겹치며 나타나 보였다.

 

그 뒤쪽으로 살아서 꼭 돌아가겠다든, 정든 고향,,,나무다리마을도 구름사이로 희끗희끗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이때에 정신이 거짓말처럼 다시 되살아난 듯했다.

마지막 힘을 다해, 기울러진 몸을 반듯하게 바로잡아 똑바로 눴다, 그리고선 입술을... 쪼금 움직이었다.


왜놈들을 몇 명이나 죽였나.....?

나 혼자.. 왜놈들 열을 제겼지....

그래!..그래!...

한방도 빗나가지 않았어!......?...


그러는 사이에, 그 가슴에서 피가 옷깃을 타고 흘러내려, 배추밭이었던, 도랑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뚝!..뚝!..뚜~욱!...떨어지며..

배추밭에 대지[大地]를 적시는 그 붉은 피는...

 

이 민족독립과

이 나라을 위할 수 있는...

 

...그리하여 식민지에서...

독립을 기어코 쟁취하기 위해, 

최후로 항일(抗日)하여...

 

조국에다가 마지막 받치는...

유일한 붉은 피였다~!


...하여......!

이름이 없는 쭝궈(中國)옷차림에 장년은, 마지막 입가에 웃음을 띠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과는 관계없이, 첫 겨울하늘에 맑게 떠있던 하얀 뭉게구름들은, 여전히 어데 론가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마지막 총성을 듣고, 조용해진 배추밭으로 검은 제복을 입은 일본순사들이, 마치 개미떼처럼 새까맣게 몰려오는 군화발소리만이 배추밭도랑을 울리고 있었다.


그 무리들 속엔 일제황제에게 멸사봉공하고 있는, 조선인 순사들도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역사실화소설-끝]-


역사실화소설을 쓴 이, 배달겨레참사랑,

  


=[맺음말]=


조금 전에 눈을 감은...쭝궈(중국)옷차림에 장년은. 조선왕국시대에서 언제나 왕권에 반항해 말썽 많았던 전라도에서 이택민-관노해방-봉기가 일어난 것 못지않게, 황해도에서도 장길산-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두 지역이 곡창지대로써, 나라관료들이 수탈하고 억압해왔기 때문이었다.


-1890해인 첫 겨울에 왜놈과 혈전하다가. 스스로 순직한 장년-열사도,  황해도에 재령평야가 있는데 그 곳에 태어났다.


-1905.11.17날에 일제군국주의자들이 을사5조약이 강압해, 조선왕국-외교권을 빼앗아간 해도, 일본제국이 황해도-재령까지 손을 뻗치지 않았었다.


- 1910.8.22날에 [조-일]합병이 강압적으로 이루지면서부터 일제총독정치에 따라 재령에도, 일본식민통치가 뻗쳐들어 와, 각가지 토지세를 물어야하고, 또한 주민세라는 것도 물어내야 하며, 한해 농사소출양도 가닥가닥 보고해야만했다. 일제가 동척을 설치해, 1차 침탈지로서 목표를 삼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해도-재령에서 여물평(나무다리-마을)은 옥답이 많아 일제가 눈독을 드렸던 곳이었다. 일제-동척을 설립한 뒤로부터, 평화스러웠던 마을이 이처럼 점점 어려워지고 또한 인심도 자꾸만 흉흉해졌다. 이러함을 두고 두메산골에 어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일본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 1913해엔 23살이 되었다.

가족을 데리고 쭝궈(中國)간토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곳에 가면, 농토가 많다는 소문을 그동안 늘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가삼간과 아주 오래된 장롱과 고리짝과 뙈기밭과 그리고 몇 개 안되는 그릇과 장독들인 집기들을, 이웃들에 헐하게 넘겨, 그 돈으로 여비를 마련해. 떠날 날을 정했다,


떠날 날인 밤에 잠이 안 왔다. 뜬 눈으로 날밤을 새운, 새벽에 마을을 나왔다.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마을언덕을 넘을 때에 거기 잿마루에 서서, 정든 마을을 잠깐 되돌아보자, 갑자기 울컥 치솟는 뜨거움이, 가슴속을 타고 목젖을 거세게 눌렸다.


아..아!....이제 가면,

내가 정든 고향마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흐...으...흠....으~헉...!

그러나 간도로 온 뒤로 맘이 바꿔졌다.

배우고 싶어서였다!


- 서간도엔 조선-교포들이 조직한 부민회[扶民會]가 있는데, 부민회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를 건립하여 조선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 학교는 무관학교[武官學校]이었다. 학교장은 이천민[李天民]으로서, 충무공[忠武公]인 이순신[李舜臣]에 증손이었다. 이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13∼1815해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 사격∼검도∼유격전∼전투전략전술들을 배워, 청년장교가 되었다.


-1921해부터 항일독립투쟁시작, 국내로 은밀히 들어와 친일파인 은율군[殷栗郡]-군수를 암살했다.


-1923해봄이었다, 쭝궈-하남성[河南省]-한단[邯鄲]에 있는 섬서[陝西]-육군 제1부 군사강습소 교관-단을 졸업, 쭝궈군[中國軍]-장교로 근무했으며, 그 뒤로 상해임정-경호원으로 발탁되어, 상해∼남경∼북경∼길림∼봉천∼간도지역들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풍찬노숙]에 따른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다.


-1925해인 봄에, 천진[天眞]에서 의열단-고문인 김창숙[金昌淑]∼유자명[柳子明]을 만나 의열단을 소개받고선. 즉석에서 가입했다.

-1925.7.29날에, 김원봉∼김창숙∼유우근[柳友瑾]∼이승춘[李承春(李化翼)]∼한봉근[韓奉根]과 함께 일본-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할 것을 의논했는데, 자금지원은 [김창숙]선생이 1,500원을 제공했고, 무기구입은 한봉근-지사가 400원으로 권총 7정과 490탄환을 구입해놨고, 폭탄(*수류탄 정도)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이 보유하고 있었던, 2개를 지원해주었다.


-1926.6(여름), 목표지점을 공격할 준비가 완료됐다, 최종결행논의에서 나석주∼유우근∼이화익∼한봉근-지사들이 공격결사대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런 뒤로 4사람논의에서 밀입국에 관한 연구에서, 4사람이 다 떠나나와  기차 또는 선박으로 잠입하느냐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 5달이 지난 뒤에 4사람인원으로는 너무 많아 발각될 위험성을 찾아냈다, 그래서 [나석주∼이화익] 2사람으로 줄였다, 그러나 첫 가을에 이르러, 최종적으로는 쭝궈(中國)말을 쭝궈사람처럼 그대로 잘해야 만이, 무사히 밀입국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 최후로 한사람으로 압축-결정되었다.


-1926.12.26(연말연시) 대낮이 조금 지난 2시쯤에, 쭝궈(중국)상선을 타고, 대련을 거처 인천으로 무사히 밀입국하는데,‘딱’ 한사람이 성공했다.


밀입국한 이는, 인천부-지나정(仁川附支那町)-38번지에 있는, 쭝궈여관으로 원화잔(元和棧)에  산둥성인(山東省人) 마중덕(馬仲德)이라고, 쭝궈사람과 똑같은 가짜 임시이름으로, 숙박-잡기장에 써놓고선 투숙했다.


-1926.12.27날, 3:13분쯤, 진남포[鎭南浦]로 행선지-표를 사서, 평양-발, 열차를 타고 경성(서울)역에서 쉬는 동안 도중하차, 남대문-5정목-13번지에 있는 역시 쭝궈-사람이 경영하는 작은 숙박소에다가 강소성(江蘇省)서 사는 마중달(馬仲達)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가짜 쭝궈-사람으로 투숙했다, 이날 투숙객들이 잠든 사이에 5통에 유서를 써 놓았다.


-1926.12.28날, 2시쯤 황금정(남대문-2정목)에 있는. 일제국영기업인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불시에 습격해, 일본인들 7사람을 사살하고 3사람을 중경상을 입힌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가짜 쭝궈사람으로 변장한 젊은 장년은, 항일독립투쟁으로 전투를 하다가, 배추밭에서 마지막 남은 3방에 탄알로 스스로 자결한, 조선에 옹골찬 독립열사에 한분이었다. 그러나 일본경시청에서 이 중대사건을 각 신문에 일절 보도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또한 이 중대사건을 극비리에 조사해왔다.


-다음해인 1927.1.13날에야 비로소 신문보도를 하도록 허락함으로서 경성(서울)에 각 신문들이 일제히 호외를 발행, 이 중대한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그 주인공과 사건경위가 모두 밝혀졌다.


-1890-1892해에 황해도 재령군[載寧君]-북율면 여물평(餘勿坪,일명 나무다리)에서 아버지 김병헌(金秉憲)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재령에 있는 명신학교(明信學校)에서 2년간쯤 학교를 다녔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본래 황해도 재령평야는 농토가 비옥하여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알려졌다. 특히 북율면과 남율면-여물평(나무다리)은 그 중심지로써, 일찍이 일제가 눈독을 드렸던 곳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 농경목표를 삼아 수탈을 계획하여, 동척을 설치할 때부터 수난이 계속되었다. 이곳에서, 일제가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현장을 보고 자랐다.


-1926.12.28날인 2시쯤에, 일본-제국기업들인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동시에 습격하여 7왜놈들을 사살하고, 3왜놈을 중경상을 입고선, 경성외과지대인 배추밭-고랑에 엎드려, 최후일각까지 싸우다가, [더러운 개들한테 잡혀, 시달리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권총으로 3방에 탄환을, 가슴에다가 스스로 쏴, 위대한 열사(烈士)에 길을 선택했다.


그때가 장년인 36살로써, 조선독립을 위해, 암살단인 비밀결사대-[의열단]-단원, 나석주(羅錫疇/1890~1926.12.28)-열사(烈士)이시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사진]: 나석주-열사와 통양척식회사-정문

--- *** --- 

 

-[애국지사였던, 김창숙-선생에 대한 검거내막]-

 

- 위처럼, 황금정(남대문-2정목)에서, 1926.12.28날인 2시쯤에 나석주-열사가 벌린 피비린 나는 혈전에서, 사용한 1폭탄(수류탄-소련제)과, 66발에 총알과 10발들이 삽탄식-권총은 스페인-제로 밝혀지자, 일제총독부는 깜짝 놀랐다.


이 대사건을 대대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일제는 만주지역에다가 비밀형사들과 밀정들을, 쫙  깔아놓았다. 배우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근데, 나석주-열사사건과 관련된, 김창숙선생은 독립군기지를 마련키 위해 유림단체를 조직한 장본인으로서, 유명한 독립투쟁지도자에 한분이신데,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국외로 망명하던 가운데, 독립결사대-비밀단체인 의열단-고문으로 활략하면서부터, 항구적인 독립운동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유림단체를 조직한 뒤에, 둔전-제(屯田 制)를 만들었고, 또한 독립군대를 양성시키고자, 그때에 만주를 장악하고 있던, 만주독립지도자로 중국인 풍옥상(馮 玉 祥)을 찾아가 협력을 구한 끝에, 허락을 얻어(1925)냈었다.

 

그때부터 힘을 얻어, 20만원을 설정한 독립자금-모금운동을 하다가, 일제헌병들이 유림단원들을 검속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곧장 북경으로 탈출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던 유림동지들은 모두 검거되었다.  이 사건을 2유림사건이라고 했다.


김창숙선생은 독립군대양병계획이 완전히 무너지자, 먼저 모금한 독립자금일부를 의열단에 제공하여, 일제에 보복계획을 세운 게, 바로 나석주-열사가 대대적으로 벌린 일제-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동시에 공격한 의거였다.


그 일이 터지자, 일제는 혈안이 되었다. 국내외에 수사망을 총동원하여, 나석주-열사와 관련된, 조선인들을 모두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27.2달에 상해에 주재한【..영국-조계에 있는 공제의원(公 濟 醫院)에서, 영국경찰이 김창숙-선생이 비밀거처하고 있는 곳을 알아내어, 일본경찰에 연락해, 체포하도 협력했다.】,  40년 동안이나 일제식민지에 저항해온 우리-독립운동사에서【영국은 언제나 일제에 협력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막대한 피해를 준 나라】였다.


이처럼, 상해에 주재해 있는 【영국-조계에서 체포된 김상숙-선생은 국내로 압송되었다.】 압송된 뒤로 2년이나 예심을 한 결과, 14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시였다. 1945.8.18날로부터, 민족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하시다가, 1962.5.10날에 중앙의료원에서 84세로 별세하셨다.

 

[참고 2]: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

 

일본제국은 1908.3달에 제24의회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조선왕국에 설치된 일제통감부는 이 법안을 조선정부에 강요해, 1908.8.26날에 고종-재가를 얻어, 그 해인 8.27날에 일제와 조선국에서 동시에 공포하였다. 이 법률에 의거해 그 해 인 12.28날에 [일-조]합작회사로써,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립돼 출범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일-조]양국정부로부터 116명을 선출하여, 창립위원으로 임명했다. 그 가운데 일본인들 위원은 83명이었고, 조선왕국에 위원들은 겨우 33인이었다. 동양척식회사-설립위원장에는 일본제국인이 선임되었다. 이러한 내막은 일본제국이 위원회에 들어있는  일제통감부관리들 가운데서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에 조선국으로는 한성(서울)에 거주하는 금융계-인사들과, 조선귀족과 고위관리들 趙鎭泰~白完爀~韓相龍~李根培들인 7명과 지방에서는 지주들 2명을 포함 모두 33인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국에서 위원에 참가한 건, 다만 형식에 불과하였다. 일본제국-동경에서 설치된 설립준비사무소는, 일본제국인들 손에 의해서, 설립에 관한 제반사무가 결정되었다.


맨 처음, 창립자본금으로는 1,000만 원으로 정했고, 나중에 20만주(1주 50원)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 6만주는 조선국에게 토지로써 투자하게 하고, 나머지 14만주들은 일제황실이 5,000주를, 그리고 일제왕족이 1,000주를 차지하도록 우선적으로 인수했고, 조선왕실은 1,700주를 인수하도록 했었다.


그리고 나머지, 13만 2300주는 일본제국인들과 조선국인들로서, 일반적으로 공모하기로 했었다. 동양척식회사창립에서, 그때에 일본제국내서 최고인기를 끌어, 광신적으로 응모주수는 공모해, 그 주수가 무려 35배에 달하였다. 그러나 조선왕국내에서는 지극히 냉담해서, 응모자수는 전체 공모주수의 경우 1.9%에 불과하였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하는데 반발을 우려해 무장-순사들을 대동했다. 무력을 앞세운 토지침탈을 감행함으로써 보선백성-토지는 속수무책으로 일본제국-소유로, 대부분이 넘갔다.

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제국은 조선국경제를 손아귀에 넣는데 구체화되었다. 1908.8달에 이르러,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만들었고. 회사설립목적은 조선왕국에 척식사업 영위로 만들었다. 조선농업이민을 통해, 식민지농업수탈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동양척식회사토지소유는, 1910년도엔 1만1천35정보였으나 1914도엔 7만144정보였고, 1919년도엔 무려 7만8천520정보나 늘어났다. 지금도 동양척식회사-대리점으로는, 대전지점과 목포지점이 남아있다.(줄임)

 

 

[참고, 2]: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 1918,10달에 일제가 조선왕국-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조선식산은행령을 발표하고선 설립했다.


1906.6달부터 조선국지방에서 설립된 6농공은행에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설립으로서, 이를 농공은행을 통합하여,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자본가들을 위해, 직접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대적인 개발은행으로 설립됐다. 조선총독부에서 그 자본금으로 1,000만 원을 출자했는데, 그 30%였다, 이는 일본인들 중역과 대부분이 행원들 2/3를 임용하여, 은행-인사권과 경영권을 장악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6농공은행과 점포들을 인수함으로써 이들 은행을 조선총독부-산하에다 두고, 산업정책금융기관으로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은 조선국내에서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막강한 경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한 , 금융정책기관으로 설립해 출범했다.


식민지-개발에 요구에 따라,  장기자금을 주식과 아울러 납입자본 10배(1924년부터는 15배)에 달하는 사채를 발행하여,  일본과 조선에서 조달했고, 산업-공공대부라 하는, 정책대출을 행했으며, 예금으로도 자금을 조성하여 일반대출도 겸행했다. 그런데 식산은행은 주식과 사채의 90%정도를 일본제국에서 소화했지만, [중-일]전쟁이 있은 뒤로, 금융조합연합회에 인수시켜, 소요자금을 조달했다. 은행자금원에서 60%정도였던 사채규모는, 1918년에는 불과 300만 원이었으나, 1944년에는 9억2,600만 원에 달했다.


1930년대인 중반까지 산미증식계획-지원과 일본인들을 위해, 농업개발을 지원했다. 산업공공들 대부만 살펴보면, 1918년에는 농업경영대출 118만 원~수리사업대출 100만 원~토지개량대출 261만 원이었으나 1936년에는

 

농업경영대출 1억 1,056만 원, 수리사업대출 7,480만 원~토지개량대출

 1,999만 원으로 증가했다. 전체 농업대출인 경우에 1918년도에 654만 원에 불과했으나, 1936년도에 들어서자 2억1,966만 원으로 증가할 만큼 농업금융으로서, 그 담당적인 역할을 하도록, 총독부는 정책적으로 주력했다, 또한 1918년도로부터 조선식산은행은 대구지점에서, 조선국-금융을 장악한, 그 대표은행이다. (줄임) => 그때, 대구지점

 

 

 

 

 

-[맺음말-끝]-

배달겨레참사랑

출처 : ★ 짱돌 ★ 은, 배달겨레참사랑입니다.
글쓴이 : ★짱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