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교사’와 그 제자
淸嵐 黃 晋 燮(수필가)
학교 앞 삼거리에는 느티나무 3그루가 삼각형으로 서 있다. 오백 년은 될 듯싶은 영험한
나무들은 유서 깊은 이 고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학교 뒤 북쪽에는 해발 276m의
철탄산이 솟아 있다.
우리는 6월 25일 이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더러는 선생님들도 눈에 손수건을 갖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35회 졸업생은 운동이나
웅변, 작문 등 다재다능하여 학교의 명예를 빛냈으므로 사제 간의 정이 깊게 배여 있었다.
식이 끝난 후 강당에서부터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정문까지 양쪽으로 후배들이
도열하여 떠나는 선배들에게 석별의 정을 베풀어 주었다.
교문에는 졸업반 담임선생님 세 분과 교장 선생님께서 떠나는 졸업생들을 일일이 껴안아
주셨다. 교문을 나선 졸업생 중에는 느티나무 밑에 군데군데 모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든 친구와의 작별과 꿈 많은 어린 시절이 끝나는 아쉬움에 터트리는 울음이었다.
나는 그때 학교 축대 벽 쪽의 가장 무성한 느티나무 뒤에서 한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는 하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은 덕이었다. 나는 부자가 왜 우는지
영문을 몰라 바라보기만 하다가 작별인사를 나누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올 때 느티나무 밑에서 울던 덕이가 자꾸만 떠올랐다. 덕이 와는 6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4학년 때는 짝꿍이었다. 덕이란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아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하였다. 겨울에는 검은 무명두루마기, 여름에는 삼배 중의 적삼을 입을 때가 많았고
신발은 짚신이 아니면 게다(나막신)였다. 덕이의 별명은 곰이었고, 읍내의 반반한 집 아이들
에게 왕따를 당했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은 P교사였다. 들리는 말로, 일본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오장(伍長, 일본 육군 하사관)을 지냈다고 하며 성격이 무척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그 교사가 우리 반을 맡게 되자 아이들은 불안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혹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데 정말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1주일에 2∼3회 철탄산을 뛰어갔다 오게 하는데 순위 절반이하는 다시 뛰게 했다.
신발이 변변치 않은 아이들은 맨발로 산길을 뛰었는데 돌이 많아 발을 다치는 때도 있었다.
선배학년과의 기마전에서 졌다고 전 학급에 빙판 운동장을 10바퀴나 뛰게 했다.
밤새워도 할 수 없는 숙제를 준 후 하지 못했다고 학급 전원에게 다리후리기(일본어 아시빠
라이)나 주먹질을 하는 일…….
우리는 열 살 안팎의 어린 나이에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벌과 훈련에 익숙
해져 가고 있었다.
P교사는 교육적인 회초리를 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풀이로 체벌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하고 있었다.
읍내에서 덕이네 마을로 가는 십리 길에는 나무고개라는 큰 재가 있었는데 밤에는
늑대와 멧돼지가 자주 나왔다. 겨울에 나무고개를 넘나들 때에는, 소백산 줄기에서 맞바로
꽂혀오는 찬바람이 아이들을 날려버릴 듯했다. 추위에 얼굴이 빨개져서 책보를 메고
교실에 들어서는 그 동네 아이들이 측은했다. 몇 아이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곰의 집도 그런 것 같았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면 집안일을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에는 나무를 하고, 여름이면 김매기에 쇠꼴을 베야 했다. 그러자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달마다 월사금(月謝金/매월 학교에 내는 수업료)을 냈었다.
곰은 정해진 날에 내지 못해 P교사로부터 번번이 독촉 받았고, 어느 때는 매질까지 당했다.
추위가 혹독한 어느 겨울날이었다. 곰과 그 동네 아이들 몇몇이 약 10분 정도 지각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곰은 게다를 신고 오다가 끈이 떨어져 맨발로 걸어왔다고 한다.
P교사는 지각한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어 주먹질한 후 꿇어앉아 팔 드는 벌을 쐬웠다.
그날 곰이 밀린 월사금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P교사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며
슬리퍼를 벗어 고무바닥 쪽으로 곰의 따귀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세 번씩이나.
벌이 끝난 후 제자리로 돌아온 덕이는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식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곰은 울지 않았다. 그것을 본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온몸에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있었던 후부터 나는 P교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여본 일이 없다. ‘
슬리퍼P’라고 불렀다. 덕이와 월사금과 P교사의 슬리퍼…….
오랜 세월이 지나간 오늘에도 그날의 분노가 잦아들지 않는다. ‘슬리퍼P’는 우리가 5학년
이 되던 해에 도청 학무과로 전근을 갔다. 모두 시원하게 생각했다.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야 알게 되었지만, 졸업하던 날 느티나무 뒤에서 덕이와 그 아버지는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아픔에 그렇게 섧게 울었다는 것이다.
긴 세월이 흘러갔다. ‘슬리퍼P’ 교사가 1980년대 말에 청량리역 앞에서 대폿집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70을 넘긴 노령이었다. 나는 늙은 ‘슬리퍼P’ 교사가 대포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청량리 588번지 입구에 있는 허름한 대폿집 주변을 찾아갔다.
그 나이에 술 주전자와 안주를 서빙 하는 것을 멀리서 보며 씁쓰레한 감회에 젖었다.
형편이 어려워서 하는지, 소일거리로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해를 그에게서 배운
나로서 유쾌하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난 후 ‘슬리퍼P’ 교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회고의 정이 깊어지는 탓일까? 초등학교 동창생들 소식이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 나무고개 넘어 그 동네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그 겨울날 곰과 같이 지각했던
친구들은 거의 중학교 진학을 못했다. 그러니 그 후의 삶은 대충 짐작이 갔다.
몇몇은 세상을 떠났다고 들려왔다.
나는 특히 곰 친구를 집요하게 찾았다. 몇 개월의 끈질긴 추적 끝에 대구에서 탄탄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덕이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기업도 기업이지만, 그 아들을 판사로 키웠다는 소식은 놀라웠다.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담임교사에게 슬리퍼로 얼굴을 얻어맞은 그 친구였다. 졸업식 날 진학을 못해 느티
나무 뒤에서 아버지와 같이 울었던 친구였다. 70대의 연륜에도 역동적인 기업 활동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들은 자랑스럽게도 법관이 되어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몇 달 후, 나는 문학행사 참석차 대구를 가게 되었다. 친구들과 연락이 되어 모처럼 대구 동창
모임을 하게 된 일정은 문학행사 참석만큼 중요했다.
나는 사전에 덕이가 꼭 나오도록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실로 반세기를 훨씬 지나, 졸업 후 처음으로 덕이를 만났다. 감격스러운 악수할 때 손가락이
하나 없음을 알았고, 그로서 덕이의 지난날을 유추하기에 충분했다. 젊었을 때 공장에서 일하다
프레스에 눌려 엄지손가락이 달아났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별로 늙지 않았고, 말이나 행동에
활력이 넘쳤다. 표정이 무척 밝았고 어릴 때처럼 싱글싱글 웃는 모습은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기업가다운 중량감이 있어 곰이라는 별명을 아직도 지니고 있음직 했다.
여섯 친구가 자리를 함께한 그날 저녁 모임은 자정이 가깝도록 술잔이 돌면서도 오히려
시간이 짧았다. 화제는 ‘슬리퍼P’ 교사, 철탄산, 나무고개, 학예회, 운동회 등 끝이 없었다.
‘슬리퍼P’는 덕이가 당한 일로 내가 지어낸 담임교사의 별명인데, 그 이야기가 나와도
덕이는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물컹한 것을 눌러 애써 가라앉히는
표정이었다.
그날 밤, 나는 대구에서 머물었는데 덕이는 내 숙소까지 와 주었다. 우리 둘은 새벽 2시가
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이는 나의 바람을 받아들여 힘들게 살아온 젊은 날의
이야기와 그의 성공담을 들려주었다.
덕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다. 그 학교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구제적 교육기관이었다. 6.25 사변 직후, 단신 대구로 가 먼 친척
이 하는 기계공장에 숙식만 해결하는 조건으로 취직했다. 야간중학에 들어가 주경야독을 했고,
야간고등학교에도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월급도 없는 직장에 다니면서 고학을 하자니
그 고생이 오죽했을까?
그는 22살에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20살 된 고향 처녀와 결혼했다. 여름에는 찜통같이 덥고
겨울에는 방안에서도 물이 어는 사장네 집 2층 함석지붕 판잣집에서 애 띤 신랑과 신부는
신혼살림을 차렸다. 처음으로 한 달에 벼 2가마가 월급으로 정해졌다.
덕이는 청소년기에 느껴보지도 못했던 사랑이란 걸 처음으로 알게 되고 역경을 극복해
나갈 활력을 얻었다. 신랑 신부는 모든 것을 얻으려 하지 말고 만들어 가자고 굳게 다짐했다.
만학의 덕이는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입대를 해야 했다.
신부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편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며 3년 동안 시부모를 모셨다.
1962년 군복무를 마친 덕이는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입대 전에 다니던 공장에 재취직하여
박봉생활 2년을 더 겪었다. 공장 사장은 덕이의 성실성과 기술력을 인정했고, 한편으로 월급
이 없었던 시절과 박봉을 견디면서 성실히 일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 사장의 주선으로 대구에서 손꼽히고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기계공장의 직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임 직장장의 좌우명은 책임감, 성실성, 생산성이었다. 이 좌우명은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명 부하직원을 통솔하는 방침이기도 했다.
덕이는 새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월급이 오르고 가정살림도 안정됐다.
60년대 후반기에 그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소규모 직기공장이었는데 여기에서
엄지손가락을 잃었다. 그 아픔과 상실감 속에서도 그는 아내의 격려로 좌절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중반기에 이르러 더욱 활성화됐다.
농촌에 가마니 짜기가 장려되고 있을 때 덕이는 가마니틀의 실용신안권을 확보하여
그 제조공장을 차렸다. 그는 가마니틀을 팔기 위해 전국 농촌을 누볐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성격이 더욱 외향적으로 그리고 사교적으로 변화됐다.
식량증산운동의 시기에 맞춰 양수기 사업도 했다. 농한기에 가마니틀이, 농번기에는
양수기가 많이 팔리는 등 추진한 사업마다 성공을 거듭했다. 그렇게 사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맥과 자본을 축적했다. 그러면서도 80년대 중반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집보다는 사업이 먼저였다는 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덕이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서울 S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법관이 되었고, 맏딸은 대학교수, 둘째 딸은 화가, 셋째 딸은 약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들 딸 모두 성가하여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부지 1,200평을 마련하여 공장을 지었고, 주식회사 유승산업을 창업했다.
MC나일론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종업원 30명에 연 매출이 70억 원에 이르며, 그 중 20%는
수출금액이라고 하였다. MC나일론은 기계부품 소재원료이다.
기술력이 뛰어나고 제품이 우수하여 판로에 걱정이 없고 사업은 성장 일로에 있다고 한다.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덕이는 조심스럽게 “슬리퍼로 얼굴을 맞던 일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시기를 가늠해 보니,
세상을 떠난 ‘슬리퍼P’ 교사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588 골목입구에서 대포장사를 하고
있을 그 무렵에 곰은 사업이 불같이 일어났고 아들은 판사가 됐다.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간 덕이는 아침에 다시 왔다. 이름난 따로국밥집을 찾아 아침을 했다.
새마을 열차를 타기 위해 동대구역에서 헤어질 때 건네주는 명함을 보고 비로소 개명한
것을 알았다.
‘유승산업(주) 대표이사, 대구상공회의소 국제협력위원 丁海瑞’ 당당한 기업가의 명함.
나는 곰의 성공을 바로 인간승리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믿을만한 편으로 들은바,
덕이는 노인대학에 피아노를 희사하기도하고, 어려운 이웃이나 병들어 앓는 친구들 소식을
듣게 되면 통 크게 구휼의 손길을 보낸다고 한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이 ‘정해서 사장’의 생애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
친구들 가운데 높은 관직을 거친 사람도 있고, 더러는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재산비교는
부질없는 일이고, 다만 슬리퍼로 뺨을 맞은 곰의 성공은 그 어느 경우보다 위대한 성공이다.
대포장사 ‘슬리퍼P’는 가고 곰은 사장이 되어 있다. (‘12.11.13)
※후기 : 실명으로 쓰는 것을 허용해준 정해서 사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슬리퍼P’ 교사도
실명을 들어내고 싶었으나 그 후손들이 읽을 수 있으므로 삼갔다. 새벽까지 나눈 곰의
성공 이야기,
대학노트 3페이지에 이르는 메모를 했다. 세상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으로 믿어 단편으로 다시 쓸 생각이다.
-받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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