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때 보잘것 없는 외모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지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증의 천거를 번번히 거부하며
십년간이나 말단벼슬아치 집극랑자리를 맴돌게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없는 몰골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전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한때 자존심과 명예를 짖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 중국유일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 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초기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옆에
꿇어 앉아야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속에서도
美日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속에 놓인 국가경제 재건,
등소평을 재 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잘 나가다 넘어지고 재기했다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 등소평 -